“병으로 못 간다고 전보만 치고 출석도 안 했다”
- 1949년 4월 21일 충북 반민특위 조사실
1949년 5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실에 60대 노인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반민족 행위’ 혐의로 불려 나왔다. 그는 1942년 6월부터 해방 직전인 45년 6월까지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반민특위 조사관은 그에게 중추원 참의가 된 경위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해명했다.
본인은 발언할 見識(견식)도 없고 성격상 중추원 참의는 절대 수락 못 하겠다고 즉시 反消(반소)를 요구하였습니다. 尹(윤태빈 충북) 지사는 “회의 때 발언 안 해도 좋고 또 참석하기 싫으면 안가도 좋다. 지방 순회강연도 물론 안 해도 좋으니 기어이 승낙하라”고 했다.
-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중 (1949년 5월 19일)
1949년 반민특위 재판정
충북 도지사의 강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중추원 참의가 됐다고 말한 이는 바로 김원근이다. 그는 충북 지역에서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반민특위 조사관은 ‘궤변’이 아니냐고 호통치며 중추원 참의 회의에 몇 차례나 참석해 무슨 발언을 했는지 물었다. 김원근의 대답은 ‘궤변’의 연속이었다.
“첫해 하도 가라고 道(충북도)에서 떠들기에 갔더니 全然(전연) 언어 不通(불통)인데 총독이 무어라고 지껄이고, 다음 정무총감이 지껄이고, 또 어느 군인 한 놈이 무어라고 떠드는 소리만 약 2시간여 듣고 그대로 나와서 이후에는 가지 않았고 그 후는 줄곧 病으로 못 간다는 전보만 치고 출석 안하였습니다. 발언 운운할 여부도 없었습니다.”
- 반민특위 피의자 신문조서 중 (1949년 5월 19일)
하지만 김원근의 말과는 달리 충추원 참의 활동의 사실(史實)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42년 6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된 직후 그는 중추원 참의 회의에 출석해 조선총독에게 이런 건의 사항을 내놨다.
“(전략) 우리 2,400만 반도의 민중도 드디어 황국신민으로서 은택을 받게 되었음을 커다란 영광으로 여기고, 반도에 부과된 특수사명을 완수할 염원에 불타고 있습니다. (중략) 지방적 민도에 비춰 감히 미력하나마 생각하는 바를 드리고자 합니다.
1. 징병제도에 대한 의무교육의 급시
수년 이래 갈망해 오던 조선인 징병제의 실현은 반도 민중을 동등하게 같은 정도로 할 수 없지만, 반면에 적령자임에도 불구하고 국어(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라서 모처럼의 은전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출처: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결정보고서 김원근 편
기록에 나타난 김원근의 행적을 보면 징병제를 적극 찬성하는 등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자고 조선총독에게 건의한 것으로 확인된다. 실제 중추원 참의 김원근의 친일 행적은 화려하다. 전시체제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941년 일제가 만든 최대의 침략전쟁 지원 단체였다. 또 1937년에는 비행기 ‘충북호’ 자금으로 5천 원을 헌납하고, 수차례 중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일본군의 분투’에 감사하는 광고를 경성일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1965년 김원근의 장례식. 그는 학교를 설립한 공로로 일제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포상과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49년 8월 김원근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불기소 처분을 받는다. (60년 후인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했다) 그의 불기소 사유는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 “道內(도내) 英育(영육)사업에 공적이 현저한 사실”이었다. 그 영육사업이란 게 그가 1924년 청주에 대성보통학교와 1935년 청주상업학교 등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김원근은 일제 강점기에 이미 학교 설립과 관련된 포상을 받았다. 1929년 일본 기원절을 기념해 교육공로자로 선정돼 조선총독부로부터 금시계 1개를 받았고, 1931년에도 또 다시 교육공로로 표창장과 탁상시계 1개를 받았다. 1940년 조선교육회가 펴낸 <교육공로자 표창후보 이력서 편> 4권에는 ‘청주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재단법인 청주상업학교 이사장 선임’됐다는 것을 교육공로 사유로 밝히고 있다. 김원근은 반민특위 체포 이후 15년이 지난 뒤 교육가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1964년 11월,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스승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민회관을 찾았다. 곧이어 교육공로자에 대한 훈장 수여식이 진행했다.
1964년 11월,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교육공로자에 대한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이날 박정희는 직접 국민훈장을 수여하는데, 이 자리에서 김원근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공적 사유는 “사학의 발전과 우수한 인재 양성에 이바지”했다는 것. 이에 앞서 김원근은 1962년에도 국민포장을 받았다. 사유는 ‘대성 여자중,고등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유능한 인재양성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김원근은 학교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일제와 대한민국 정부에서 모두 포상을 받았다.
김원근이 훈장을 받던 날, 또 다른 친일반민족행위자 3명도 함께 박정희로부터 교육 공로자란 사유로 훈장을 받았다. 바로 배상명, 이숙종, 그리고 민영휘다. 김원근 등 이들 4명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규명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인물이다.
휘문고에 세워져 있는 민영휘 동상. 현재 민영휘의 후손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민영휘는 동족을 배반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와 함께 막대한 은사금과 각종 포상을 받은 대표적 친일파다. 휘문고를 설립했다는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됐다. 사망 30년이 지난 그는 대한민국 교육 공로자가 된 것이다.
이숙종은 애국금차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등 각종 친일단체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동했던 인물로, 성신여대 설립자다. 배상명은 친일단체였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으로 선출돼 황국신민과 징병 독려를 주창했던 인물이다. 이름을 따서 상명대를 설립했다.
다음은 배상명이 1942년 5월 매일신보에 기고한 ‘역사에 남을 여성이 되자’라는 글 중 한 대목이다.
“1944년부터 징병령이 조선에도 실시되게 된 것은 반도민중의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아직까지 지원병에 부치던 반도인에게 이제는 떳떳한 제국의 군인으로서 국방의 중책을 지게 된 것은 크나큰 광영이며, 더구나 반도여성으로서 받는 이 감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우선 교육자인 입장에서 반도의 여성을 어떻게 교육하며 더구나 군인의 아내요 어머니인 중책을 담당하여 나갈 군국 여성을 연성하는 데 종래보다 더 한층 결의를 새로이 하며 교양과 지식을 길러나갈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숙종은 같은 달 매일신보에 ‘다시 한번 굳게 해야 할 진총보국의 결의’라는 글을 기고했다.
“조선에도 징병령이 2년 후부터 실시되게 된 것은 너무도 기다리던 일이라 그 감격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군국의 여성을 길러 낼 조선 교육계의 책임은 더욱 큰 것은 물론이나 나로서도 교육자란 입장에서 그 책임과 함께 광영을 느꼈습니다.”
배상명과 이숙종 모두 징병을 찬양하며, 소위 여성 교육가로서 일제에 충성을 다짐한 것이다. 이들은 각각 1937년과 1936년, 현 상명대의 전신인 상명고등기예학원과 현 성신여대 전신인 성신여학교를 설립했다.
1964년 11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교육에 평생 바친 선생님들을 표창’이라는 표제로 김원근 등에 대한 서훈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박정희가 직접 나와 친일반민족행위자 4명에게 국민훈장을 수여했던 그날, 식장에는 스승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동아일보는 “교육에 평생 바친 선생님들을 기리 새겨 훈장 수여“라고 기사를 썼다. 이는 박정희의 친일파에 대한 대한민국 훈장 서훈의 전주곡이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각계에 포진한 친일파에게 훈장을 무더기로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름 | 대한민국 훈포장 | 일제훈장 | 해방 후 주요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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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휘 | 국민훈장모란장 | 1935년 12월 31일 사망 | |
김연수 | 1961년 한국경제협의회 초대 회장 | ||
김원근 |
조선귀족 . 중추원 참의 출신 6명 훈장 내역 보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민족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을 친일파라는 흔적을 지우는 기회로 적극 활용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전공을 이유로 무더기 훈장을 받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악질 친일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이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했던 그는 일제의 훈8등 서보장까지 받운 인물이다.
노덕술은 해방 이후 훈장을 3개 받는다. 그는 일제로부터도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노덕술은 해방 조국에서도 반민특위 활동을 적극 방해하는 등 반민족 행위를 지속했다. 이승만은 그에게 무려 3개의 훈장을 줬다. 악질 친일파인 그가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제 헌병으로 역시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신상묵도 모두 8개의 대한민국 훈장을 받는다. 노덕술같은 일제 경찰 출신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 아래 승승장구하며 모두 17명이 37건의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름 | 대한민국 훈포장 | 일제훈장 | 해방 후 주요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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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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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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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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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을 토벌하고, 고문한 것으로 악명높은 간도특설대 등 일제 군인 출신도 대거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백선엽, 박정희 등에게 최고등급의 무공훈장을 수여한다. 한국전쟁은 전 민족에겐 최고의 비극이었지만, 친일 경찰과 군인들에게는 신분 세탁의 공간이 된 셈이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일제 강점기 군인 출신 53명이 모두 180개의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상당수는 국가 유공자 대우를 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이승만 시기 친일파에 대한 훈장 수여는 주로 일제 강점기 경찰과 군인 출신에 집중됐다.
이름 | 대한민국 훈포장 | 일제훈장 | 해방 후 주요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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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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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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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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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대구복심법원. 조선의 독립을 꿈 꾼 청년이 재판을 받고 있다. 키 190센티미터에 이르는 건장한 체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1년 동안 경찰의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였지만, 그의 풍채는 여전히 좋아 보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26살 심재인이다.
1937년 일본 유학 전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키 큰 이가 심재인이다.
그가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간단했다. 일본 유학 시절 심한 차별을 겪으면서 민족 의식이 싹텄다. 그는 법정에서 판사 3명에게 이렇게 말한다.
“쇼와 14년(1939년) 11월경 일본인으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일본인은 나에게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나는 집에서 부모님들에게도 맞은 바가 없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고민도 했고 격분도 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분석하여 일본과 조선 간의 모든 건이 민족 시야에서 보게 되었다.”
- 독립운동가 심재인 판결문 중에서
심재인은 박근철 등 동료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결심을 하게 된다.
“우리들은 조선을 독립하여야 한다고 상의하며 그 실천 방법으로써 ‘우리 조선 청년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공부도 하며 행동을 해야 한다. 일지사변(중일전쟁) 이후로 상당한 장기전이 계속되어 일본 국력은 약화될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선 독립의 호기가 온다는 것을 예상하고 그때까지 실천할 행동계획을 협의하였다.”
- 독립운동가 심재인 판결문 중에서
일제 하 한국인 판사들은 이렇게 조선의 독립을 꿈꾼 20대 청년에게 죄를 물어 징역 4년 형을 선고한다. 심재인은 대구 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고 심재인은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3년의 옥고 동안 그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출옥 직후 촬영된 그의 모습이다.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직후 촬영된 독립운동가 심재인의 모습. 왼쪽 키 큰 이다.
유학 시절 풍채 좋던 몸은 사라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이 사진은 일신의 영달을 버린 가시밭길, 독립 운동의 험난함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보고 심재인의 아내는 계속 울기만 했다고 한다. 심재인에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심재인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안겨준 판사 3명 중 2명이 한국인이었다. 나항윤과 고재호다. 이들은 둘 다 해방 이후 대법관 자리까지 올라갔고, 대한민국 훈장도 받았다. 고재호는 1983년 전두환으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는다. 사유는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 및 후진 양성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나항윤 역시 대법관을 지냈다.
독립운동가 심재인의 1943년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기록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일제 판검사 출신들 가운데 독립운동가 재판에 참여한 이는 민복기, 고재호, 나항윤, 오승근, 방순원 등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을 지냈다.
취재 도중 만난 한 독립운동가 후손은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재판한 한국인 판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살아 계신다면 우리 가족에게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어떤 반성이나 회개 같은 게 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주 늦게라도 그런 마음이 조금 있으면 하는 데, 뭐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뉴스타파 취재진은 대한변호사협회를 찾았다. 이들 일제 강점기 한국인 판사 중 일부는 해방 이후 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이도 있었다. 그래서 변협 차원에서 어떤 입장을 낼 수 있는지 물었다. 변협 관계자는 이 문제를 충분히 공감한다고 밝혔지만, 일제 하 한국인 판검사들의 친일 전력과 관련해 “지금까지 협회의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름 | 대한민국 훈포장 | 일제훈장 | 해방 후 주요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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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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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항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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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호 | 국민훈장무궁화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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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서울에 있는 대학 가운데 친일파 중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이가 설립했거나 총장을 지낸 곳을 집계해 봤다. 모두 15개 대학이 나왔다. 이들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규명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됐거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이다.
어둡게 표시된 구 지역을 누르면 해당 지역의 내역이 표시됩니다.
뉴스타파는 여성 교육계 친일 인사를 대상으로 그들의 인맥을 추적했다.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과 해방 이후 행적을 교차 분석했다.
1937년 설립된 애국 금차회. 친일파 박흥식의 부인 등이 참여한 이 단체의 이름은 금비녀까지 바치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한다는 뜻이다. 이 친일단체의 간사와 발기인에 6명의 인사가 참여한다. 고황경, 김활란, 조기홍, 송금선, 이숙종, 서은숙이다.
이들 6명의 관계는 1939년부터 40년 사이, 부인문제연구회로 이어진다. 이들은 황국신민으로서 징병을 독려하고 침략 전쟁에 임하는 어머니의 자세를 강연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그리고 1941년, 조선 최대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된다. 8명이 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에 참여한다. 고황경, 김활란, 배상명, 박인덕, 서은숙, 송금선, 이숙종, 황신덕이 그들이다. 이들은 조선의 청년과 처녀를 전쟁터와 근로정신대로 보내자고 주창했다.
다음은 이들의 주요 발언을 발췌한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최후의 내 생명까지 국가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국가에 속한 내 남편이나 아들, 또 내 생명이 국가에서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 김활란 (1942년 12월 '신시대' 제2권 제12호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우리 어머니들은 첫째 우리의 자녀를 건강하게 기르십시다. 우리의 아들은 지금부터 우리 개인의 소유가 아니요, 천황 폐하의 적자요, 국가의 것이니까, 아무쪼록 튼튼하게 길러서 바칩시다. 둘째,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아들들이 원만한, 명예스러운 군인이 되어 멸사봉공을 하도록 그 정신을 넣어둘 것인가를 생각하여 실행하십시다.
- 박인덕 (기독교신문, '징병제 실시와 반도여성의 각오' 1942.06.03)
"저는 어머니가 아니니까 좀 추상적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니 자신이 먼저 황국신민 된 신념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자장가 속에라도 나라의 관념을 넣어 주며 길렀으면 합니다. 즉 어머니의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 고황경 (매일신보, 1942.06.01 '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좌담회2-자장가 들릴 때에도 충군애국의 뜻 담아’ )
이름 | 대한민국 훈포장 | 일제훈장 | 해방 후 주요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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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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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덕 | 국민훈장모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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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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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도 이들의 행태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대상이 일왕에서 박정희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들이 이사장과 총장을 했던 대학들은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전체주의적 교육 정책을 충실하게 따른다.
1977년 대한뉴스 영상, 상명여대 학도호국단 훈련장에 배상명이 참관하고 있다.
이숙종은 1971년 박정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자. “적중한 시책”이라며 박정희를 옹호한다. 또 1973년에 유정회 국회의원이 된다. 고황경은 5.16 구데타 직후 재건국민운동부에 참여했고, 김활란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지지를 호소했으며, 송금선은 유신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진출한다.
그래서일까? 친 독재의 길을 걸었던 이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훈장 공적 사유에는 유독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 유공’이 많다. 고황경, 박인덕, 배상명, 서은숙, 송금선, 조기홍 등이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에 기여했다는 명목으로 국민훈장을 받았다.
동요 <고향의 봄> 작사가로 널리 알려진 이원수. 1984년 전두환으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고향 마산에는 그의 문학관이 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고향의 봄 1절
이원수가 1984년 훈장을 받은 사유를 보면, 문학단체 활동을 통한 ‘항일투쟁과 아동문학 발전’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에 쓴 동시를 보면 훈장 사유로 적혀 있는 ‘항일투쟁’이라는 단어가 무색해 진다. 이원수가 1942년에 발표한 동시 중 하나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
반자이(만세) 소리는 하늘에 찼네
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
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
- 1942년 지원병을 보내며
이원수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 문학인 명단에 수록된다. .
마산에 있는 이원수 문학관에는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 동시도 함께 전시돼 있다. <고향의 봄>과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서로 다른 작품을 남긴 이원수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공(公)과 과(過), 공도 있으면 과도 있는 법이라는 말로 풀어낼 수 있을까? 이원수 문학관장은 그 평가는 “각자 알아서 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동심초>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를 작곡한 김성태. 그는 <군국의 어머니>, <흥아행진곡> 등 수많은 친일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김성태는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 정권을 위해 <재건의 깃발 아래에서>를 발표했다. 또 1972년에는 박정희를 찬양하는 <대통령 찬가>를 작곡한다. 이 노래는 애국가요로 지정된다. 대통령 찬가의 가사는 박목월이 지었다. 독재자에 대한 낯 뜨거운 칭송을 담은 <대통령 찬가>의 가사 1절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찬란한 아침과 편안함 밤의
자유와 평화의 복지 낙원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 길이 빛나리라 길이 길이 빛나리라.
김성태는 박정희로부터 3개의 훈장을 받는다. 1962년 국민훈장 모란장, 1963년 홍조근정훈장,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이다.
친일 문화 예술인 가운데 유독 음악인들의 훈장 공적 사유에는 ‘애국심 고취’라는 단어가 많다. 이에 대해 이경분 서울대 일본연구소 연구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독재자의 경우는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우리는 하나다, 한 통속이다, 어떤 단결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 음악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박정희 입장에서는 애국심 고취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애국심의 그 위에는 박정희가 있는 것이죠. 국민들이 하나로 단결되어 가지고 밀어줘야지 국가가 지도하기도 쉽고...애국이라는 건 독재자들이 이용하는 굉장히 위험한 정서가 아닐까요.
이름 | 대한민국 훈포장 | 일제훈장 | 해방 후 주요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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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
| 1943 만주국 문교부대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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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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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 금관문화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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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인사 명단을 확정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서훈 기록 72만 건 가운데 정확한 인적사항을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이 약 6천 명 가량 됐다. 주로 1950년대 서훈자들인데, 주민번호 등 신원 정보가 기재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동명이인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문제는 전체 상훈을 관리하는 정부도 정확한 명단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훈기록에 나온 인물의 인적사항을 묻는 뉴스타파 질문에 행정자치부 상훈과 공무원은 “특정인의 서훈내역을 추정만 할뿐이지 확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동명이인을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뉴스타파가 독자적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6천여 명 가운데 국가유공자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경우, 묘비를 찾아 거기에 기재된 훈장 내역을 확인했다. 현충원 묘비 기록은 유족들이 의뢰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겠지만, 고인의 수훈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방식으로 취재진이 파악한 친일 인사의 서훈 내역이 80여 건에 이른다.
그런데 현충원에 안장돼 있지 않아 묘소를 찾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또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하더라도 묘비에 훈장 내역을 기재해 놓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친일 인사들의 경우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명단에선 제외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친일파 중 해방 이후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뉴스타파는 지난 넉달 동안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72만 건의 대한민국 서훈 내역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인사 명단을 하나하나 대조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훈포장을 받은 친일 인사는 222명, 훈장 수여 건 수로는 모두 440건이 확인됐다.
친일파에 대한 각 정권 별 훈장 수여 건수로 보면 이승만 집권 시기 162건, 박정희 집권 기간에는 206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전두환 정부 28건, 노태우 정부 22건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도 각각 7건과 2건이 확인됐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 친일 인사들에게 준 훈장은 모두 368건으로 전체의 83.6%였다.
연도별로 분류한 친일인사들의 훈장 수여. 1963년과 1962년이 가장 많다.
뉴스타파는 연도 별로 훈장 수여 빈도도 분석했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2년과 1963년에 집중됐고, 1970년에도 많았다. 박정희가 친일 인사들에게 무더기로 훈장을 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의 분석은 이렇다.
이 때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큰 변동기인데, 이 때 박정희로서는 자기의 우군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였을 겁니다.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제대로 이용해서 그리고 또 받은 사람 입장에서도 국가의 이름으로 훈장을 받는 건 국가로부터 보장을 받는 거니까 그런 서로 간 쌍방 간 이해가 떨어지고.
-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이들 친일인사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훈장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독재에 부역한 대가였고, 과거 부끄러운 친일행적을 감추는 면죄부는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친일 인사 222명 가운데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이는 모두 66명, 총 125건이었다. 또 일제로부터 훈장과 각종 감사장을 받은 이들 중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훈장을 받은 이는 48명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68년, 그리고 72만 건의 서훈.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청산 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그리고 독재의 역사이기도 하다.
공동기획: 민족문제연구소
데이터: 김강민, 이보람, 연다혜
디자인: 최미정
사진: 최형석, 정형민
출판: 임종헌
자료조사: 박다영 최은혜
제작: 뉴스타파 개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