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지 못한 민간인학살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정전 70년을 맞아 한국전쟁 때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희생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발간한 조사보고서를 전수조사했다. 사건별, 지역별 민간인 희생 현황을 조사한 경우는 많았으나 남한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사건을 모두 조사해 시기별, 지역별로 살펴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페이지로 구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57,882명

뉴스타파가 진실화해위 보고서 전수조사를 통해 추산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추정치다. 몇몇 연구자들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이 100만 명 규모라고도 한다. 5만 7천여 명은 이에 비하면 상당히 적다. 이번 뉴스타파 조사는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건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실제 발생 규모와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진실화해위도 한국전쟁 이후 많은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일단 진실규명 신청자가 적고, 증거를 찾기도 힘든 상황 등의 여러 조사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 독립기구가 공식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전쟁이 야기한 민간인 희생의 규모를 파악해 보는 건 ‘종전 70년’을 맞는 시점, 즉 아직도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의미가 적지 않은 일이다.

누가 그들을 죽였나

진실화해위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해 주체를 크게 이승만 정권의 군과 경찰, 미군, 그리고 적대세력 등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 적대세력은 북한인민군과 지방 좌익세력 등을 말한다.

세 가해주체 가운데 군과 경찰이 압도적으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추정치는 41,082명으로 전체 희생 규모의 71.0%다. 특히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때문에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2만 명 가까이 치솟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엔군과 국군이 낙동강전선까지 밀려났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한 이후인 1950년 10월에는 부역자 처단과 토벌작전에 따른 민간인 희생이 크게 늘어났다. 1950년 11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고 1951년 1월 북한인민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면서 전황은 다시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민간인 희생도 다시 크게 증가하는 모습이 데이터 분석으로 확인된다.

미군에 의한 희생은 공중폭격, 함포사격, 지상군 총격 등으로 발생했다. 미군은 군사목표뿐 아니라 ‘민간인’, ‘민가’, ‘피난민’에게도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8,814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됐다.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은 한국전쟁 초기1.4후퇴 직후에 집중돼 있다.

마지막으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은 북한 인민군의 남한 지역 점령 직후와 후퇴 직전에 주로 발생했다. 인민군과 지방좌익 세력, 그리고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지 못하고 산악지대로 들어간 빨치산이 저질렀다. 군경의 민간인학살을 보복하는 차원의 학살도 상당수 발생했다.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인민군이 퇴각하던 1950년 9월에 집중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토대로 집계한 결과 최소 7,986명이 적대세력에게 학살됐다.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학살 양상

민간인학살이 벌어진 위치 정보를 바탕으로 지역에 따른 희생 양상을 살펴봤다. 전선과 전황의 변동에 따라 시기, 지역별로 민간인학살 규모의 추이가 달라지는 것이 확인된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유족회 활동 등 진상규명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학살 피해 집계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강원도에서는 사건 조사 신청 자체가 거의 없어서 학살 규모 추정치가 가장 적게 집계됐지만, 강원도에서 민간인학살 사건이 적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강원도 철원 등 접경 지역과 휴전 협상 당시 치열한 교전 지역에선 민간인 희생이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생과 관련한 진실 규명 신청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수도권 (서울, 경기, 인천)

전쟁 초기 수도권에서는 조사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거의 없다.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빠른 속도로 남하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신청 사건 자체가 적어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이 시기에는 용산대폭격 등 미 공군의 집중폭격으로 서울에서만 시민 4천 명 넘게 희생됐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과 국군이 다시 서울과 수도권을 탈환한다. 그 직후인 9월 말부터 10월까지 수도권 여러 지역에서 우리 군과 경찰이 숱한 민간인에게 인민군 부역혐의를 씌워 학살하는 사건이 대거 발생했다. 10월에 발생한 고양 금정굴 사건이 대표적이다.

강원

강원도 지역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관련 신청 사건이 거의 없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희생 규모 추정치가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1951년 1월 희생 규모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강원도 홍천 삼마치 고개 미군 폭격 사건으로 수천 명의 피난민 가운데 1천 명 넘는 사람이 학살됐기 때문이다. 피난민 폭격 사건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임에도 ‘홍천 삼마치 사건’과 관련해 진실화해위에 들어온 진실규명 신청 건수는 2건에 불과했다.

충청 (충북, 충남, 대전, 세종)

충청 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 집단학살은 1950년 7월 5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됐다. 이 시기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대전 골령골에서 대전형무소 수감자 등 1,8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됐다. 실제 희생자는 7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지역에서는 부역 혐의 희생사건 가운데 단일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건도 벌어졌다. 1950년 10월 8일 인민군이 퇴각한 이후, 충남 서산경찰서가 우익단체를 동원해 서산·태안 지역에서 2천명 가량의 민간인을 인민군에 부역했다며 집단살해했다.

경상 (경북, 경남, 대구, 울산, 부산)

경상도 민간인 희생 대부분이 우리 군경이나 미군에 의해 일어났다. 전쟁 초기 경산코발트 광산에서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 등 18,000명이 집단학살됐다. 1950년 7월 민간인 희생 규모가 치솟은 이유다. 8월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희생 규모가 크다. 8월 초순부터 낙동강 전선이 고착되면서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 등을 군경이 살해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말 대구를 중심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됐다. 이때부터 낙동강전선은 9월 말까지 2달 가까이 격전지가 됐다. 이 시기에 미군 폭격에 따른 희생도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전라 (전북, 전남, 광주)

호남 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이후에도 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다른 지역에 비해 수복 시기가 늦고,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이 산악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경의 토벌작전이 민간인을 대상으로도 자행됐기 때문이다.

호남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제주

제주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경찰이 예비검속을 시행했다. 제주 예비검속자들은 과거 좌익단체 가입자와 4·3사건 관련자라는 이유 때문에 요시찰 대상자로 관리되고 있었다. 이들은 7월 중~하순경, 8월 중순경 등 2차에 걸쳐 집단 총살되거나 수장됐다.

시군구 단위로 본 민간인학살

뉴스타파는 시군구 단위로 언제, 누구에 의해, 얼마나 많은 민간인 희생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아래 지도에 정리했다.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한 제한된 조사 결과이지만, 이 데이터 분석만 보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로 대한민국 전역이 거대한 무덤처럼 변해간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아직도 밝혀지지 못한 죽음까지, ‘당신이 보지 못한 민간인학살’은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중요성을 말없이 보여준다. 이 수많은 민간인의 죽음은 또 함부로 전쟁을 들먹이는 자들이 꼭 새겨야 할 경고이기도 하다.


지도에서 행정구역을 선택하면, 해당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을 알 수 있다.

희생자 추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