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도 자르는데 총 맞은 자리가 워낙
아파서 하나도 아프지 않아.
적을 사살하면 귀를 끊어 와라 전투 성과로…
거기는 바늘하고 실 가지고 묶어 다녔어요.
사건 당일 콩 볶는 것 같은
총소리가 마을까지 들렸어요.
‘장날 소떼 엮듯이’ 새끼줄로 묶인 채 끌려가
성재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한 거예요.
사건 발생 직후 고금면 청룡리 해안가로
손이 묶인 시신이 떠내려왔죠.
국군이 마을에 주둔하며 소ㆍ닭 잡고
보초 세우고 실컷 부려먹다
떠나면서 총살한 겁니다.
3년 1개월간의 전쟁은 한반도 대부분을 초토화했다. 동시에 남과 북이 서로 비전투원, 즉 민간인을 학살하는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도 숱한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누적 사망(명)795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진실화해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 민간인희생 조사보고서 252권을 전수조사했다.
그리고 누가 언제 어디서 민간인을 얼마나 학살했는지 그렸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전역이 피로 물든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건을 토대로 집계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피해자 규모는 57,882명 가량이다. 물론 빙산의 일각이다. 전문가들은 실제 피해 규모의 5%~10%만 진실 규명 신청이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6만 명 가까운 희생자 가운데 우리 국군과 경찰이 학살한 민간인은 41,082명으로 전체 희생자의 71%나 됐다. 무차별 폭격 등 미군에 의한 학살이 8,814명으로 15%, 북한인민군과 좌익세력이 학살한 민간인은 7,986명으로 14%다.
뉴스타파는 학살, 보복, 재보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 서산, 정명호 씨의 사부곡
정명호(73) 씨는 안주머니에서 빳빳하게 코팅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아버지 사진. 10대 후반 시절이다. 그는 이 흑백 사진을 항상 안주머니에 지니고 다닌다.
“아버지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됐거든요. 1950년 7월 10일 서산경찰서에 끌려가서 다음 날 희생됐어요. 시신도 못 찾고, 어떤 식으로 돌아가셨는지도 전혀 몰라요. 서산경찰서에 간 것만 알고 있어요.”
그 때 아버지는 스물 일곱이었다. 정 씨 가족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가좌리에 살았다.
“고모가 저를 업고 있었는데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 갔다’는 거예요. 그러고서는 그 뒤부터 소식이 없는 거야.”
“열일곱 살 정도에 찍은 사진이에요. 유일하게 남은 사진입니다.”
백발이 된 아들이 열일곱 빡빡머리 모습의 아버지
사진을 가슴 가까이 들었다. 부자의 눈매가 꼭 닮았다.
정명호 씨는 지난 2009년 1기 진실화해위에 아버지
사건과 관련해 진실규명 신청을 하려 했지만 이미 접수
기한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국민보도연맹’ 관련
사건은 신청 여부와 무관하게 진실화해위가 직권조사
형식으로 조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2010년 1기 진실화해위가 조사결과를 내놨을 때 아버지 사건은 들어있지 않았다. 진실화해위는 “시간이 부족해 다 조사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저희 서산 11개 읍면 중에 4군데만 조사하고 마감했더라고요.”
정 씨는 10년이 지나 2기 진실화해위에 아버지 희생 사건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리고 2023년 7월 현재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둘. 이승만 정권의 ‘살인 리스트’ 국민보도연맹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전국의 ‘국민보도연맹원’을 마구 잡아들였다. 이렇게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과 이미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 수만 명이 1950년 7월에서 8월 사이 잇달아 학살됐다.
학살 규모는 최대 10만 명까지도 추정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이 좌익 관련자를 전향시켜 관리할 목적으로 만든 단체다. ‘보도’는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좌익 활동과 관련없는 사람도 가입시켰다.
사람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킬 때는 좋은 세상이 오고 나라를 위해 가입을 해야 된다고 꼬드겨서 가입을 시킨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보도연맹원 10명 중 2명 정도가 실제 좌익 활동과 관계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도장 찍으라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된 거죠.
(전oo/ 당시 고령경찰서 순경 )또 다른 이들은 비료나 고무신을 타려고 가입했다.
마을 구장과 반장이 품앗이도 하고 비료나 고무신을 타려면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해서 내용도 모르고 남편이 도장을 찍었는데 그게 보도연맹 가입 도장이었어요.
(송oo /충북 청원군)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보호와 인도”가 아닌 제거를 택했다. 보도연맹 명부는 ‘살인부’가 되어버렸다.
우리 부친은 가난해서 글도 모르고 학교도 안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동장 최 씨가 각 마을에 보도연맹 가입자를 몇 명씩 추천하라고 경찰서에서 지시가 왔다고 했어. 그리고 최 씨는 우리 마을에서는 자신과 친한 아버지와 고모부를 추천했지. 결국 전쟁이 나자 최 씨는 살고 우리 아버지는 죽었어.
(양oo/ 경북 영천시)셋. 최상부에서 내려온 학살 명령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끝은 비슷했다.
전국에서 10만 명 가까운 민간인이 군과 경찰에 살해됐다. 구덩이에 묻히고 수장됐다. 그러나 보도연맹 학살 현장 사진은 거의 없다.
1950년 여름 대전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에서 일어난 보도연맹원 및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현장을 미국 군사고문단 애보트 소령이 촬영한 게 거의 유일하다.
주한미국대사관 육군무관 밥 에드워드 중령은 애보트가 찍은 사진 18장을 본국에 보내며 “정치범 1,800명의 처형”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 사진에는 트럭에 실려 학살지로 이송되는 사람들, 구덩이 앞에 엎드린 민간인을 사살하는 헌병, 구덩이 속 시신을 확인하는 민간 청년단원의 모습 등이 담겼다.
사진에 나오는 골령골 학살자는 충남지구 CIC(방첩대), 대전 지역 경찰, 제2사단 헌병대 등이다. 미군은 학살 현장을 촬영하고 기록했지만, 동시에 학살을 방치하고 묵인했다.
밥 에드워드는
보고서에
“이러한 살상이 전선 인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처형) 명령은
의심의 여지 없이 최상부에서 내려온
것이다”라고 썼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는
대전 골령골. 여기서 학살된 사람은 최대 7,000명으로
추산된다.
넷. 골령골, 전숙자(전미경) vs. 국가
전숙자(75) 씨는 아직도 TV에서 폭력적인 장면이 나올 때면 고개를 돌린다. 아버지가 생각나서다. 전 씨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간 아버지가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를 할아버지에게 들었다.
아버지 고 전재흥 씨는 좌익활동을 한 동생에게 “도망가라, 살아서 만나자”라며 자신의 도민증을 줬다. 경찰은 동생을 도피시켰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잡아갔다. 1951년 1월 일이다. 전재흥 씨는 시초면지서에서 서천경찰서로, 그리고 대전형무소로 이송됐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골령골에서 처형됐다.
전숙자 씨가 아버지의 구체적인 사망 경위를 알게 된 것은 1기 진실화해위 진상규명 결과를 받고 나서였다.
진실화해위는 전재흥 씨 희생 사건과 관련해 ‘진실규명 불능’ 처분을 내렸다. 이유는 전쟁 당시에 절차를 밟아서 재판을 통해 형을 받은 경우는 진실규명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재판을 통해 형을 받았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전 씨는 아버지 관련 정보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 어렵사리 육군본부(계룡대)에서 아버지가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은 판결문을 찾았다.
전 씨는 이 판결문 자체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토대로 진실화해위에 경정신청을 해 2010년 12월 “불능결정을 취소한다”라는 결정을 받아냈다.
“이게 아버님 판결문이에요.”
전숙자 씨가 판결문을 꺼내 들었다. “판결문에는
아버지가 ‘1950년 7월 10일 같은 마을에 사는 라OO을
살인해서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내렸다’고 나와요.”
전숙자 씨는 라OO의 가족을 수소문한 결과 라OO의
큰딸과 만날 수 있었다.
“판결문에는 (아버지가) 50년 7월 10일 라 씨를 죽였다고 나오거든요. 그런데 라 씨는 9월 27일 서천등기소 창고 학살 사건 때 돌아가셨더라고요. 그 큰딸이 증언해줘서 2013년 1월 우리 아버님의 무죄판결을 받아냈어요.”
이처럼 골령골에선 국민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좌익 활동을 한 가족을 뒀다는 이유만으로도 끌려가 학살됐다. 그리고 전재흥 씨 경우처럼 조작된 혐의로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기도 했다.
[서천등기소 창고 학살사건]
1950년 9월 27일, 노동당원과 정치보위부원들이 서천등기소 창고에서 마을의 우익 인사들을 창고에 가두고 불을 질러 집단학살했다. 희생자는 경찰, 국군, 대한청년단, 지역유지, 우익협조자, 반공활동 등에 가담한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적대세력, 즉 북한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로 서천 지역에서는 25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뉴스타파가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집계한 한국전쟁기 인민군과 지방좌익 등의 민간인 학살 규모는 7,900여 명이다. 이른바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가장 컸던 시기는 1950년 9월~10월이다. 북한인민군과 지역 좌익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점령지에서 퇴각하면서 ‘반동분자’를 학살했기 때문이다.
적대세력 관련 지역별 주요 사건은 이어지는 ‘파트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숙자 씨는 2020년 11월 유해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인 골령골을 내려다봤다. “사람을 죽이고 저렇게 해두는 나라가 어디 있나요. 세상에 저런 꼴이 어디 있어.”
골령골에서, 아산에서, 서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학살돼 구덩이에 묻혔으나 수십 년 넘게 그대로 방치한 나라가 있다.
전숙자 씨는 그 나라를 상대로 이겼다.
대전 골령골 민간인학살지 발굴 현장/ 2020. 11. 5. 촬영다섯. 아산, 맹 씨 일가족 몰살 사건
1951년 1월 6일, 맹억호(74) 씨 가족 9명은 ‘부역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사건의 발단은 9.28 수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산을 점령했던 북한인민군이 떠나자 1차 부역자 색출이 시작됐다. 온양경찰서가 앞장서서 동네 사람들을 끌고가 학살했다. 맹 씨의 할아버지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며 학살 반대 연판장을 받으러 다녔다.
그것이 빌미가 됐다. 맹 씨 아버지는 ‘부역자’로 지목돼 온양경찰서로 끌려간 다음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우리 아버지가 죄인으로 끌려 다니는 사이에 우리 가족을 ‘부역자 가족’이라는 죄명을 씌워 가지고 동네에서 끌어다가 면사무소 창고에다 가뒀다가 집단학살한 거예요. 저희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또 고모 두 분, 삼촌 한 분, 저희 누나 이렇게 해서 총 아홉 분이 희생됐습니다.”
맹 씨가 말한 삼촌은 학살될 때 맹 씨보다 더 어렸다. 2살도 안 된 아기가 할머니 등에 업혀갔다가 그대로 희생됐다.
정작 맹 씨의 아버지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가족이 몰살당한 화를 이기지 못 했다.
“우리 아버지는 무죄로 풀려나왔는데 그 뒤로 화병으로 한 6개월 사시다가 그냥 돌아가셨어요.”
맹억호 씨는 2기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상태다.
여섯. “한국의 전형적인 처형 방식”
뉴스타파는 주한미국대사관 육군무관 밥 에드워드 중령이 본국에 보낸 또 다른 보고서를 발견했다. 1951년 5월 3일자로, 역시 민간인 학살 관련 사건을 다루고 있다. 현장 사진도 7장 첨부했다.
에드워드 중령은 사진을 설명하면서 “한국이 행한 전형적인 처형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전형적인 처형 방식’이란 무엇이었을까?
사진 속 현장의 일시 장소는 1951년 4월, 대구 인근이다. 미 군사고문단 소속 군인이 사진을 촬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죄목은 ‘공산주의자 부역 행위(Collaborating with the Communists)’다.
사진은 한국 군경의 전형적인 처형 방식을 차례로 담고 있다. 에드워드는 보고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희생자들의 이름이나 이들의 구체적인 범죄 성격에 대한 정보는 없다.”
일곱. 미군의 전형적인 폭격 방식
1951년 1월 20일, 미 5공군 35전투요격단 소속 머스탱 전폭기 2대가 단양군 영춘면 일대에서 1차 폭격을 시작했다. 네이팜탄과 로켓탄을 퍼붓고 캘리버 50 기관포를 갈겼다. 이어 49전투폭격단 7, 9전투폭격대대 소속 F-80 슈팅스타 제트전투기 8대가 합류해 역시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로켓탄을 발사했다.
단양 영춘면 곡계굴에 네이팜탄을 퍼부은 미군기와 같은 기종인 F-51 머스탱 전폭기이 폭격으로 영춘면 곡계굴에 피난와 있던 민간인 300여 명이 학살됐다.
당시 곡계굴에 피난 갔다가 폭격 전날 밤 나온 조병규(75)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느닷없이 미국 폭격기가 와서 폭격을 해서 마을 전체를 완전히 불바다로 만든 거예요. 마을 50여 가구를 전부 다 태웠어요. 네이팜을 쏴버리니까 완전히 불길이 그냥 이 굴 안으로 들어갔겠죠.”
당시 4살이었던 조 씨는 가족과 함께 곡계굴에 피난을 가 있었으나 밤에 너무 울어서 고모가 등에 업고 집에 있는 어머니에게 데려다줬다고 한다. 다음 날 미군 폭격으로 굴에 있던 조 씨 일가족 4명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한국전쟁 동안 군사목표뿐만 아니라 민가나 피난민 행렬도 적 은신처 또는 적군의 위장 대열로 간주해 폭격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1.4후퇴 시기 피난민이 1천 명 넘게 학살된 ‘강원도 삼마치 고개 미군폭격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