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변과 위선의 기록
1988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언론청문회가 열렸다. 언론대학살로까지 표현되는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박정희 독재 시절 동아일보 광고 사태 등 군사정권 시절 언론 탄압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 중에 4대 신문사-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의 사주가 증인으로 참석한 언론청문회의 전문을 공개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행위를 어떤 궤변으로 부인하는지, 80년도 언론인 해직 사태의 책임을 어떻게 회피하는지 독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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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친일 행위 부인
이철 위원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 논쟁을 벌여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누가 더 민족지냐 그런 경쟁입니까?
이철 위원
예. … 결국은 반일 친일 논쟁을 하면 둘 다 결과적으로 좋지 않다하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것이 중단되었던 것으로 봅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아니 친일이라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철 위원
양사가 우리 민족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권력에 굴종했던 그 역사가 우리 언론사의 하나의 치부로 남아있습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시면 곤란합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 지금 국민이 시청하고 계시고 또 우리 조선일보 200만 독자가 이 자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조선일보가 과거 일제의 앞잡이를 했다고 모독을 하고 매도를 하시고 비난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은 언론청문회에서 친일 행위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뉴스타파 취재 결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지면에 일제 찬양 행위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조선일보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 일왕이나 일제에게 특별한 날인 경우 신문의 1면 우측 상단에 붉은 일장기를 새겼다. 또한 조선일보는 1937년, 동아일보는 1938년부터 매년 1월 1일마다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게재했다. 이러한 지면 배치는 1940년 8월 폐간때까지 계속되었다. 기사 보러 가기

02
5공화국의 회유와 공작
강삼재 위원
언론 통제를 위해서 언론인 강제숙정과 언론통폐합 등 언론대학살을 저지른 바 있는 5공화국 정권은 보도지침을 이용한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언론사와 언론인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각종 특혜를 베풀게 됩니다.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각 언론사가 5공화국의 정권으로부터 제공 받은 혜택은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80년은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
강삼재 위원
다음에 82년 한 해동안 윤전기 도입시에 20%를 물던 관세가 4%로 낮추어졌지요. 그렇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것은 잘 기억이 안납니다.
강삼재 위원
다음 방우영 증인! 5공화국 이후에 정부가 언론인에게 베푼 각종 시혜로 인해서 각 언론사의 사주는 사원복지비 300억 원 이상을 절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강삼재 위원
증인께 묻습니다. 정부가 왜 이같은 혜택을 언론인들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언론에 대한 일반적인 선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본 위원이 판단하기로는 언론인들에 대한 복지를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 위원은 이같은 혜택을 언론사의 사주가 베풀어야지 정부가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데 증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옳은 말씀입니다.
강삼재 위원
정부로부터 그러한 혜택을 받으면서 어떻게 정부의 감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전두환 정권은 언론통폐합, 언론인 강제 해직, 언론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언론에게 다양한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며 언론과의 유착 관계를 강화했다. 윤전기 도입세가 20%에서 4%로 낮아지고, 언론인 해외 연수, 자녀 학자금 지원, 주택 자금 융자 등의 혜택을 정부가 제공하면서 언론사의 사주는 사원복지비를 300억 원 이상 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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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주제별로 둘러보기
1988년도 언론청문회의 전문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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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해직(1980) 언론통폐합 5공화국 수혜 친일 행위 부인 신문협회 결의문 신군부 찬양 보도 보도지침 족벌 경영 언론기본법 언론자유수호운동(1975)
위원장 정대철
성원이 되었으므로 회의를 속개하겠읍니다.
그러면 다음은 김상만 방우영 이종기 장강재 이상 네 분 증인의 선서와 신문을 하도록 하겠읍니다. 먼저 증인선서를 하기에 앞서 선서취지와 처벌규정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읍니다. 증인은 이번 국회문교공보위원회가 국회법 제61조 규정에 의해 언론문제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개회함에 있어 정당한 이유없이 선서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국회에서의 증언·감정등에 관한 법률 제 12조에 의거 1년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만일 양심에 반하여 허위의 증언을 한 때에는 동법 제 14조에 의거 1년이상 10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증언을 함에 있어 폭행 협박 기타 모욕적인 언행으로 국회의 권위를 훼손하는 때에는 동법 제 13조에의하여 5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고발될 수 있으며 동법 제9조3항에 의거 증인으로 이 법에서 정한 처벌을 받는 외에 그 증언으로 인해 어떠한 불이익한 처분도 받지 아니함을 알려드립니다. 이상입니다.
다음은 선서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읍니다. 선서는 증인들께서 단상앞으로 나오셔서 위원장을 향하여 다함께 선서하여 주시고 선서가 끝난 다음에 선서서에 각각 서명 날인하시어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증인들께서 나오셔서 선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상만, 방우영, 이종기, 장강재 증인선서) 제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증인에 대해서 신문을 하도록 하겠읍니다. 먼저 통일민주당의 강삼재 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해진 시간을 좀 엄수해주셨으면 감사하겠읍니다.
강삼재 위원
통일민주당의 강삼재 위원입니다. 80년도 언론대학살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이자리에서 보도지침이 난무하던 85년부터 국정에 참여한 본위원은 지난 3년동안 전두환정권의 악랄한 언론통제를 저지하지 못한 점 언론인과 국민에게 책임을 통감하면서 깊이 사과드립니다. 본청문회가 이땅의 언론의 과거를 청산하고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장강재 증인에게 묻겠읍니다. 장증인! 장증인께서는 한국일보사의 80년도 강제해직자가 몇 명입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30명으로 집계됩니다.
강삼재 위원
30명입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예.
강삼재 위원
해직자 명단은 누구로부터 전달받았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당시 편집이사인 정태현이사로부터 전달받았읍니다.
강삼재 위원
전달받은 명단은 총 몇 명이었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40여명으로 기억이 됩니다.
강삼재 위원
그러면 40명인데 실제 해직자는 30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강삼재 위원
어떻게 줄일 수 있었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그 당시 저를 비롯한 전간부가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30명이라는 숫자가 불행하게 다 구하지는 못하는 결과가 되었읍니다.
강삼재 위원
그 당시 전달받은 해직자 명단을 줄이려고 하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줄일 수 있었읍니까? 누구를 만나야 줄일 수가 있었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그 당시 뭐 자세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마는 문공부 보안사 기타 각 정부당국자들 이런 사람들을 전 간부가 쫓아다니면서 그야말로 노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강삼재 위원
그 당시 해직자 명단 강제 해직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 증인께서 직접 만난 사람도 있읍니까? 사원을 살릴 욕심으로 한 명이라도 언론인을 구제하기 위해서 직접 발로 뛰면서 누구를 만나 적이 있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여러 사람을 만났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강삼재 위원
그 당시 힘있는 사람은 누구였어요? 누구를 만나서 누구에게 부탁하면 부하 직원을 살릴 수 있었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그 당시 아주 여러 분을 만났었읍니다.
강삼재 위원
그 당시 해직자 리스트가 올 때 그 기준은 어떻게 되었던가요?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리스트는 그당시 공식적인 통보가 아니고 비공식 통보였고 그래서 그 명단은 아마 기술한 것을 우리 정태현 이사가 받아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삼재 위원
그 이후에 복직자는 몇 명입니까? 지금 명 명이 복직되었읍니까? 그 30명 중에...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저희는 30명중에 복직을 희망하는 사람이 열두 분이 계셨읍니다. 그중에서 열한 분이 복직이 되었고 한 분이 아직 복직 절차 중에 있읍니다. 나머지 열여덟 분은 그중에 다섯 분은 주재기자고 다섯 분은 폐간된 서울경제에 포함된 사원이고 나머지 여덟 분중에 한 분은 국회의원이 되셨고 한 분은 대학교수가 되셨고 한 분은 승려가 되셨고 나머지 다섯 분은 한겨레신문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간단하게 증인의 견해만 묻겠읍니다. 80년도 단행된 해직이 강압에 의해서 부당하게 취해진 조치라면 해직자의 명예회복과 원상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데 증인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동감입니다.
강삼재 위원
다음 방우영 증인에게 묻겠읍니다. 80년 7월 30일 신문협회 총회에서 언론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한 적이 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그때 참석해서 부회장으로 사회 맡았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강삼재 위원
그 당시 결의문은 누가 작성한 것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 당시 결의문은 문공부로부터 신문협회 사무총장께 하달 되어가지고서 그 안을 가지고 제가 사회를 맡았읍니다. 잠깐 답변의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강삼재 위원
제가 질문을 하겠읍니다. 그 결의는 자발적이었읍니까 아니면 강제성이 있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강제성이었읍니다. 형식은 자발적이고 내용은 강제였다고 저는 기억하고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조선일보는 해직자는 총 몇 명입니까? 80년 강제해직자…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14명입니다.
강삼재 위원
조선일보에서도 해직자 리스트를 받은 적이 있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누구로부터 누가 받았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당시 저희 신문사 부사장이 문공부로부터 1차 경단자를 수교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읍니다.
강삼재 위원
이광균장관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강삼재 위원
그 당시에 해직자 리스트는 몇명이 담겨져 있었읍니까? 리스트에…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1차에 5명 2차에 7명 그리고 3차에 2명이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1차에 다섯 명? 그러면 총 몇 명이 되나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14명입니다.
강삼재 위원
그렇다면 해직자 리스트에 담겨 있는 14명 전원을 해직시켰다는 것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강삼재 위원
그렇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예.
강삼재 위원
이 14명 중에 현재 복직된 인원은 몇 명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한 분입니다. 그리고 지방주재기자 또 본사 구제된 분이 한 5·6명이 되고 나머지는 저희 동료들 또 저희 간부들이 백방으로 노력해서 해직된 기자를 다 취직시켰다고 저는 보고를 받고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조선일보가 다른 신문사에 비해서 그 당시에 이 위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 해직자 리스트는 장강재 증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보통 30명 선 내지는 20여 명 선 조선일보에는 그 숫자가 다른 사에 비해서 적은 이유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런 일은 전연 없읍니다. 숫자가 적었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그런데 14명을 전원을 해직시켰다는데 그 14명 중에서 줄일 수 없었읍니까? 아까 한국일보에서는 40명 내려온 해직자 명단 중에 우리 장강재 증인을 비롯해서 간부들이 뛰어서 12명을 줄였거든요. 그 당시 14명 내려온 명단 그 분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안해 봤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읍니다. 그래서 우선 1차 정규만씨를 구제해서 현재 본사 총무부장으로 재임하고 있고 그리고 전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일곱 사람을 그 당시 다른 신문사에다가 동료들이 애써가지고 복직을 시켰읍니다.
강삼재 위원
예. 알겠읍니다. 지금 본위원은 지금부터 80년 당시에 중앙 4대월간지가 신군부의 등장을 앞다투어 과잉보도한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읍니다. 동아일보 80년 8월 28일자 본위원이 빨간 줄 친 부분 [새 시대 기수 전두환 대통령 정도 성실 평범 속의 비범 실전 의협심 많은 청소년시절 흰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연습 즐거움에 습관길러] 그 다음에 중앙일보 80년 8월 23일 [내가 아는 전두환장군 청년장교때부터 지휘력 뛰어나 자상하나 의리 저버리면 서릿발 혈연 지연 거부는 천성적] 다음에 조선일보 80년 8월 23일자 [인간 전두환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시념과 의지와 행동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다음 한국일보 8월 23일자 [전두환장군 의지의 30년 그의 통솔력은 기술이 아닌 지극한 정성 예리한 판단력 무서운 지도력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을 헐뜯는 것]... 김상만 증인께 묻겠읍니다. 본 위원이 80년도 8월 당시에 그 당시에 각 언론사가 보도한 전두환 대통령 특집기사를 소개해 드렸읍니다. 이와같은 보도는 각 언론사가 계엄하에 마지못해 협력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발적인 것입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동아일보는 창간 당시부터 편집은 편집인 편집국장에게 맡기고 사장이나 회장은 거기에 관연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읍니다. 따라서 80년 8월 전두환씨에 대한 것도 전연 아는 바가 없읍니다.
강삼재 위원
본위원은 당시의 상황이 불가항력적이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마는 결과적으로 언론이 독재체제구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바입니다. 다음 이종기 증인에게 묻겠읍니다. 80년도 언론통폐합조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압에 의해서였읍니까 아니면 자율에 의해서였읍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강압에 의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강삼재 위원
잘된 것입니까 못된 것입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삼재 위원
본위원이 자료를 하나 더 소개해 올리겠읍니다. 지금 본위원이 제시하는 이 보도는 80년 11월 17일자 각 신문에 사설을 제가 증인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있읍니다. 통폐합 결의를 하고 난 연후에 각 신문의 사설은 통폐합결의가 잘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읍니다. 방우영 증인께 묻겠읍니다. 그 당시 만약에 이 결의가 잘못된 것이고 강압에 의해서였다면 이와 같은 가설을 어떻게 해서 게재가 되게 된 것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 당시 막강한 군부세력에 위한 계엄하에 있었읍니다. 그러한 사설도 제 생각에는 주필을 통하여 정부에서 권유하고 또 게재할 것을 설득했다는 타필에 의해서 그런 사설이 나왔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강삼재 위원
알겠읍니다. 김상만 증인께 묻겠읍니다. 언론을 통제를 위해서 언론인 강제숙정과 언론통폐합 등 80년의 언론대학살을 저지른 바 있는 5공화국 정권은 보도지침을 이용한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언론사와 언론인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각종 특혜를 베풀게 됩니다.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각 언론사가 5공화국의 정권으로부터 제공 받은 혜택은 어떠한 것이 있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80년은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방송광공사로부터 사원자제들에게 장학금을 준 것이 그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강삼재 위원
증인께 제가 확인을 해 보겠읍니다. 언론통폐합 이후에 81년부터 당장 지면이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됐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강삼재 위원
다음에 82년 한 해 동안에 윤전기 도입시에 20%를 물던 관세가 4%로 낮추어졌지요. 그렇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것은 잘 기억이 안납니다.
강삼재 위원
다음 지난 7년동안에 일간신문의 신규발행 인가가 동결이 되어서 서울의 6개 일간지가 독점체제를 지방은 일도일사로 독점체제가 유지됐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강삼재 위원
다음 지난 7년동안 광고물량은 4배로 늘어났으나 언론사는 제한돼 있고 그래서 광고수입이 엄청났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엄청났다고 하는 것보다는 늘어났읍니다.
강삼재 위원
다음 신문협회를 통해서 구독료인상 및 지면증면 등의 카르텔 체제를 구축했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신문협회는 발행인이 나가는 곳이 되어서 나는 회장이니까 거기에 나갈 권리가 없읍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읍니다.
강삼재 위원
예. 알겠읍니다. 이와 같은 유무형의 특혜로 5공화국하의 언론은 고속성장했음을 본위원은 확인한 바가 있읍니다. 김상만 증인께서 혹시 87년도 동아일보의 자본총계액이 81년에 비해서 몇 배나 늘어났는지를 아십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강삼재 위원
동아일보의 자본총계액은 81년에 비해서 4.5배가 늘어났읍니다. 그리고 6개 일간지의 경우 87년 결산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성장율은 81년 대비 300%로써 우리나라 일반제조업체의 평균성장율을 훨씬 웃돌고 있다는 사실을 첨언해 드립니다.
다음 방우영 증인! 5공화국 출범 이후에 정부가 언론인에게 베푼 각종 시혜로 인해서 각 언론사의 사주는 사원복지비 300억 원 이상을 절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강삼재 위원
그럼 제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겠읍니다. 지난 7년 동안 44억을 들여서 언론인 1,313명을 해외에 시찰시켜 준 사실이 있읍니다. 그리고 177억을 들여서 언론인자녀 연 18만 4,00명의 학자금을 대주었읍니다. 알시고 계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것은 정부의 일방적인 특혜가 아니겠읍니까?
강삼재 위원
그러니까 정부가 언론인에게 베푼 각종 시혜를 제가 설명을 하고 있읍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강삼재 위원
다음 253명을 해외연수 시켜주고 기자들의 월급 중에 20%를 취재수당으로 인정해서 면세해택을 주었읍니다. 아시고 계시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알고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그밖에 언론인 9,000명에게 주택자금을 융자해 주었고 생활안정자금을 대부해 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보고받았읍니다.
강삼재 위원
증인께 묻습니다. 정부가 왜 이같은 혜택을 언론인들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언론에 대한 일반적인 선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강삼재 위원
본위원이 판단하기로는 언론인들에 대한 복지를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위원은 이같은 혜택을 언론사의 사주가 베풀어야지 정부가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데 증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옳은 말씀입니다.
강삼재 위원
정부로부터 그러한 혜택을 받으면서 어떻게 정부의 감시자가 될 수 있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이 자리에서 저는 이렇게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같이 정부의 일반적인 선심이라는 측면도 있읍니다. 그러나 본증인 또 조선일보사는 5공과 유착해서 소리를 택한 일이 한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읍니다.
강삼재 위원
본위원은 이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장강재 증인 지난 80년도 권력이 무자비할 때 언론이 완전히 손을 들었지요?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강삼재 위원
이종기 증인 보도지침 전화 한 통화에 언론이 놀아난 것을 인정하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부분적으로는 인정을 하겠읍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런 사실 없읍니다.
강삼재 위원
김상만 증인 그동안 책임을 다하지 못한 언론사 사주로서 국민에게 사과할 용의는 없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정부에서 해직자 사원을 지시를 받아서 그대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강삼재 위원
신문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신문을 마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다음은 박관용 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박관용 위원
네 분 증인에게 신문하겠읍니다. 우선 제가 증인 네 분에게 공통된 말씀을 드립니다. 도의상 네 분을 대표해서 중앙에 앉아 계시는 이종기 증인께서 간략히 답변해 주시면 좋겠읍니다. 오늘의 언론청문회는 결단코 지난 5공화국 체제하의 언론이 저질렀던 과오를 무마시키거나 희석화시키는 청문회가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하면 오늘의 청문회가 지난 시대의 한국언론에 대한 면죄부를 끊어주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오늘 이 청문회는 지난날 우리 언론이 국민과 역사앞에 범했던 오류를 들추어 내고 따짐으로 해서 앞으로 우리 언론이 진정한 국민의 언론 민주화된 언론역사 앞에 떳떳한 언론으로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고 하는 정신 아래서 이 청문회는 진행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와같은 청문회의 참뜻에 동의하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동의합니다.
박관용 위원
감사합니다. 적어도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언론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그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우리는 이 청문회를 통해서 똑똑히 보고 있읍니다. 증인께서도 그렇게 느끼시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그렇습니다.
박관용 위원
우선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언론인 언론사 사주 여러분들의 주식소유분포를 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나라 4대일간지가 철저하게 족벌 경영화 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읍니다. 다시 말하면 김씨가 아니고 방씨가 아니고 장씨가 아니고 이씨가 아니면 언론사 사장이 될 수 없는 소수의 손에 사회의 공기와 우리 국민의 눈과 입이 되는 언론이 장악되어 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거기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겠읍니다. 지금 박위원이 말씀하시는 부분에 대해서 제가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각사마다의 형편은 다 틀리겠지만 각사마다의 형편에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인데 앞으로 만약 그렇게 됐다고 할 것 같으면 주식의 공개를 통해서라든지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박관용 위원
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간략히 지분의 분포상황을 말씀드리겠읍니다. 우선 동아일보는 고려중앙학원 및 인촌기념회의 지분이 전체의 55%입니다. 기타 그 일가친척들이 분할소유하고 있는 주식으로 형성되어 있읍니다. 조선일보는 방씨 가족소유분이 90%가 됩니다. 중앙일보는 삼성 그룹의 지분이 70.3%가 됩니다. 그리고 한국일보는 장강재회장의 개인지분이 98.4%를 이루고 있읍니다. 이와 같은 지분의 분포가 공개를 하라거나 어떻게 우리는 요구할 수는 없읍니다. 다만 그와 같은 주식의 분포상황이 몇몇 사람의 손에...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한국일보의 경우는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박관용 위원
예. 그러면 정정해 주십시오.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제가 57%를 갖고 나머지는 동생들이 10%씩 갖고 있읍니다. 아까 말씀하신 족벌경영에 대해서는 어느 신문기업 뿐만 아니라 어느 기업도 족벌경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소유와 경영은 다른 것이고 저희 같은 경우에는 각모체의 사장이 공채출신의 사장이 전부 되어 있읍니다. 그래서 소유와 경영이 다른 것이고 또 신문기업은 특성상 경영과 편집이 독립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관용 위원
제가 경영과 편집의 독립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말씀드리고 우선 대한민국의 언론이 소유주식 지분을 중심으로 하는 분석이올시다.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98%라고 해서요...
박관용 위원
이것은 제가 말할 때 개인으로 표시한 것 같은데 그 집안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정확한 자료일 수는 없읍니다마는 찾아보다 어떤 학위논문을 본 바 있읍니다. 신문학을 전공하는 학위논문을 보면 지난 6년 다시 말하면 80년도부터 86년까지 비교해볼 때 555.5%의 성장을 했다는 이런 논문이 있읍니다마는 이것은 정확한 통계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제가 본청문회에서 허문도 증인에게 5공화국의 언론자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상당한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고 말한 바 있읍니다.
우리 모두가 웃어넘겼읍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론기업들의 기업할 자유를 언론자유라고 한다면 그 자유는 5공체제하에서 상당히 누렸던 것도 사실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저는 이와같은 상황 아래서 과연 언론의 자유는 누가 수호해야 하느냐 권력이 언론자유를 보상해 줄 수는 없읍니다. 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도 아니합니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언론인 스스로는 5공화국 체제하에서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는지 우리 장강재 증인께서 답변해 주십시오.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5공화국 상황하에서는 언론 스스로는 최선은 다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뼈아픈 자성을 하고 있읍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답변할 기회를 준다고 하면 아까 강위원께서도 그러시고 지금 박위원께서도 언론이 80년대에 굉장한 성장을 했다 또 특히 어제 허문도 증인이 국회증언을 통해서 그런 형태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일보의 경우는 사실과 다릅니다. 한국일보의 경우에는 80년도에 통폐합 당시 서울경제의 폐간으로 250억 상당의 재산의 피해를 입었읍니다. 그리고 80년도에 경영적자가 났었고 81년도에서부터 87년도까지 년간 외형성장은 11%씩 되었지만 70년도의 20% 성장에 비하면 그 반밖에 안되는 수준입니다.
박관용 위원
한국일보가 당시 시가 200억 가까운 서울경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 대해서 대단히 본위원도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제가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5공체제 아래에서의 일반적 언론기업의 성장세를 얘기하는 것이올시다. 그 말씀하시는 뜻은 알겠읍니다. 제가 얘기하는 측면은 그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방우영 증인에게 묻습니다. 80년도에 서울 본사에만 네 사람의 기자가 해직됩니다. 그중에 정규만씨 당시 서울시에 출입하던 정규만씨만 복직되었읍니다. 이 사람만 복지되게 된 어떤 동기라도 있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특별한 동기는 없읍니다. 본인이 자신이 오해를 받아 가지고 해직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보고받고 알았읍니다.
박관용 위원
제가 주목하는 것은 나머지 세사람 보다는 이 사람이 가장 검열을 거부했다거나 이런데 있지 아니 했다라고 듣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정규만씨는 언론자유운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이 되는데 그러시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조선일보 사원이면 우리 편집부 사원은 누구나 다 자유언론을 위해서 같이 노력하고 투쟁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읍니다.
박관용 위원
혹시 증인께서는 언론보도와 관련해서 정보기관에 불려가거나 연행되거나 그런 사실이 있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언론인생활 20년이 넘었읍니다마는 많은 수모도 당했고 또 그런 조사기관에도 몇차례 갔다 왔읍니다.
박관용 위원
그러면 그런 수난을 당하신 언론인으로서 경영인으로서 편집과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편집과 경영의 분리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셔야 되겠읍니다.
박관용 위원
지금 현재 5공체제하에서 조선일보사가 경영과 편집이 분리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형태가 아니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것은 위원님의 의견이시고 저는 또 달리 생각하고 있읍니다.
박관용 위원
그러면 조선일보사는 사주의 방침이 경영과 편집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회사다 그렇게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그 소신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저는 84년에 발행인을 그만 두었읍니다. 경영만 제가 하고 신문제작은 편집출신고참들이 발행을 맡아 가지고 정도를 걷는 신문을 만들 수 있도록 발행인을 위임하였읍니다.
박관용 위원
무슨 말씀인지 알겠읍니다. 그것은 제가 듣기로는 경영과 편집을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받아 들이겠읍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될 것으로 믿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우선 김상만 증인에게 묻습니다. 80년 대량해직이 일어났을 때 명단이 문화공보부로부터 넘겨옵니다. 그 명단을 보신 적이 있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예. 보았읍니다.
박관용 위원
실제 해직기자와 그 명단과는 차이가 있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관용 위원
75년도 3월에 DBS의 프로듀서, 엔지니어 등 160명의 언론인이 대량해직이 됩니다. 이 당시의 해직배경을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것은 160명이 아니라 134명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발생하게 되었으냐 하면 유신정부하에 동아일보는 광고를 내지 못했읍니다. 만7개월동안 광고없는 신문이 되었어요. 그러면 어떤 때에는 백지로 광고면을 채우고 어떤 때에는...
박관용 위원
당시 그 고통스러웠던 광고난에 관해서는 우리가 다 알고 있읍니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런 광고로 해서 겨우 연명을 해 왔었는데 1975년 3월 12일부터 13 14 15 나흘 동안을 편집국사원들이 공장을 점거해서 신문을 낼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공장문을 두드려깨고 판매국사원 보급소사원 가판하는 아동들이 점령당한 공무국으로 들어갔읍니다. 들어 갔더니 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사원들은 순순히 나가 주었읍니다. 만일 그때에 활자를 뒤엎었다고 하면 우리가 신문을 몇일동안 못 냈을 것입니다. 공장을 점거당하고 있을 때 옆에 앉으신 방우영 조선일보사장이 하루는 동아일보를 찍어 주시고 그 다음날은 장강재 한국일보사장이 동아일보를 찍어 주시고 또 그 다음 다음날 이틀동안은 신아일보 장기봉사장이 동아일보를 찍어주면서 이 이상 도저히 찍어 줄 수 없으니 그런 줄 아시오 그렇게 통보를 받았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공장을 탈환했던 것입니다 공장을 탈환하고 보니까 탈환한 다음에 일부공장을 점거하고 있던 사원들은 동아일보의 문을 닫더라도 자유언론을 수호해야 하겠다 하는 그런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분들은 아니다 동아일보는 계속해서 나가면서 투쟁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의견이 맞섰읍니다. 그래서 134명을 자르고 싶어서 자른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등기우편으로...
박관용 위원
그러니까 공장점거가 곧 기자해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렇죠.
박관용 위원
그러면 당시 경영악화 때문에 해직시켰다 라고 하는 당시의 주장하고는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계속 하겠읍니다. 그래서 해직당한 분한테는 세 차례나 등기로 편지를 냈어요. 빨리 귀사하라고 그랬는데 영 복귀하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6개월이나 기다리다가 3월중순부터 9월중순까지 6개월이나 기다리다가 해직 안할 수가 없었죠.
박관용 위원
예. 알겠읍니다. 어쨌든 당시 발표는 경영악화로 인한 해직이다라고 역시 기구축소를 하기 위해서 그렇다 라고 발표를 하셨는데 당시 얘기하고 지금 증언하고는 상반되지 않습니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읍니다. 광고사태가 일어난 다음에 수입이 적으니까 구조축소를 했읍니다. 예를 들면 심의실 기획실 등등 기구축소해서 18명을 해직시켰죠. 그리고 광고사태로 해서 재정난이 심하기 때문에 그당시에...
박관용 위원
지금 증인께서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가 다 알아 듣겠읍니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페이지 수를 줄이고 또 임원들이 10명이었는데 세 명으로 줄이고 또 사원들의 봉급도 줄였읍니다. 그만큼 아주 절약한 생활을 해 나갔었읍니다.
박관용 위원
예. 알겠읍니다. 당시 회사가 경영악화 지금 봉급을 줄이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당시 경영이 대단히 어렵다고 말씀하시자 당시 동아일보의 기협분회장은 장윤환 기자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봉급을 낮추겠다 봉급인하해서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자 이런 주장도 있었읍니다. 어쨌든 간에 당시 상황은 경영악화라는 이유로 이것이 진행되었다 라고 생각이 들고 어쨌든 이 해직사건과 광고탄압과는 유관한 것으로서 해직직후에 광고탄압이 풀리기 시작했다 라는데 많은 언론인들이 주목하고 있읍니다. 또 조선일보에도 본사의 해직기자 숫자가 적은 것은 이미 75년도 해직과 유관하다 이런 얘기가 있읍니다. 어떻습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동아일보기자들을 해직한 것은 1975년 3월 17일이고 광고가 풀린 것은 1975년 7월 13일인가 됩니다. 그러니까 만 4개월이 지난 다음에 광고가 풀렸읍니다.
박관용 위원
알겠읍니다. 제가 시간에 너무 쫓겨서 장강재 증인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다른 신문은 보도지침을 받고 전부다 없애 버렸는데 마침 한국일보에는 이것이 정리돼서 보관 돼 있었읍니다. 따라서 그것이 김주언 기자가 복사해서 폭로함으로 해서 자유언론투쟁에 상당한 계기를 마련했읍니다. 어떻게 해서 이 보도지침을 그렇게 보관하게 되었는지 경위를 혹시 아시면 증인께서 말씀을 좀 해 주시지요.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86년초로 기억이 됩니다. 당시 문공장관이 프라자 호텔에서 만나자 그래서 간 적이 있었읍니다. 그때 이정배라고 홍조실장을 대동하고 왔었읍니다. 그래서 미니 차트 같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보도지침을 한국일보가 4대지중에서 가장 많이 위반을 했다 하는 그런 경고 비슷한 것을 받았읍니다. 그래서 그것이 있은 이후에 제가 여러가지 이유에서 앞으로는 그것을 기록을 남겨라 하는 지시를 한 적이 있읍니다.
박관용 위원
그래서 그것을 보관하게 됐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예. 그렇습니다.
박관용 위원
예. 감사합니다. 제 얘기를 결론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5공화국 시절동안 그전 유신체제하에서도 마찬가지였읍니다마는 국민들로부터 언론이 신뢰를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여타부분에 많이 군사독재정치가 끼친 폐해로 인해서 국민들의 불신과 오해와 여러가지 뒤범벅이 됐읍니다. 이제 민주화의 새로운 시대에 접했읍니다. 많은 언론인들은 지난 5공체제하에서 저질러졌던 언론들의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국민 앞에 용서를 빌고 새롭게 출발하고 거듭 태어나자라고 지금 얘기하고 있읍니다. 제가 이자리에서 부산일보의 광고사설을 하나 가지고 왔읍니다마는 크게 "애독자 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썼읍니다. 물론 죄송하다는 이 용어 자체가지고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언론의 모습을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새로운 새 출발을 위해서 오늘 이자리가 마련 되고 또 이 기회가 그런 새로운 출발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는 것을 양해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면서 제 신문을 마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위원장 정대철
오늘 국민의 관심과 중대 사안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각당에 미리 배정된 시간보다 지금 5분 내지 7분을 더 드리기 시작을 했읍니다. 여타 당에도 골고루 배분해서 더드리도록 하겠읍니다. 따라서 지금 백남치 위원 차례입니다마는 나중으로 돌려서 제가 또 기회를 드리겠읍니다. 그리고 한가지 부연해서 말씀 드릴 것은 동아일보의 명예회장이신 김상만 회장께서는 고령이시고 또 제가 보고 받기에 지병을 갖고 계셔서 미리 저희들이 이러한 것을 보고를 받고 80년 당시의 발행인이신 이동욱 사장을 참고인으로 저희들이 출석요구를 했읍니다. 따라서 위원님들께서는 이러한 것을 참조하셔서 참고인인 이동욱 사장께서도 여쭈어 볼 수 있겠읍니다. 다음은 신민주공화당 차례입니다. 신진수 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진수 위원
공화당의 신진수위원입니다. 방우영 증인에게 몇 가지 묻겠읍니다. 근래에 조선일보의 사설을 통해서 또 여러가지 기사를 통해서 사장님의 또 증인의 발행인의 심정이 보도된 것은 지금 미래한국의 언론의 나갈 길 또 방향을 발행인으로서의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제가 이자리에서 언론인의 본연의 사명을 다했느냐 못했느냐 그 면책을 받겠다고 이자리에 나오지 않았읍니다. 본청문회가 5공하에 저질러진 여려가지 언론에 대해 진상을 규명해 주시고 다시는 권력에 의해서 언론이 목을 조이는 일이 없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해 주셔야 되겠다해서 기꺼이 동참하고 또 모든 물음에 대해서 정직하게 아는 사실에 대해서 답변하기 위해서 이자리에 나와 앉아 있읍니다.
신진수 위원
증인께서는 80년 10월초에 발행인협회 간부들과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만난 사실이 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1980년 몇 월입니까?
신진수 위원
10월초에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8년전 이야기라…
신진수 위원
그때 알려진 증인과 같이 노태우 보안사령관과 만나서 언론의 통폐합을 반대할 것을 건의했던 그런 얘기가 있는데 그런 것이 기억 안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런 사실이 있었읍니다.
신진수 위원
그때 참석했던 분이 누구누구이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 중앙일보사장이신 홍진기씨 또 당시 합동통신사 회장으로 계션던 박용곤씨 그리고 저 또 한두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마는 당시 언론통폐합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곧 단행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들이 신문협회에서 의논하고 당시 보안사를 찾아가서 통폐합을 중지해줄 것을 저희들이 건의하였읍니다.
신진수 위원
그 건의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8년전이라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마는 모든 상황을 알아서 언론인들이 걱정이 없도록 선처해주시겠다 그런 것으로 저는 지금 기억하고 있읍니다.
신진수 위원
걱정이 없도록 선처하겠다고 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언론의 불행의 결과를 가져왔었읍니다.
한가지 더 증인께 묻고자 하는 것은 며칠전에 신동아일보의 장기봉 발행인이 증인으로 나와서 여러가지 문제를 신문협회를 통해서 또 증인과의 지금 장기봉 증인과의 관계를 얘기했는데 그 사실을 보신 적이나 또는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천만의 말씀이올습니다. 저도 ⸢텔레비젼⸥을 통해서 충격을 받았읍니다. 7월에는 당시 유학성씨가 중앙정보부라고 증인을 했다고 알고 있은 양… 7월에 저희들은 만난 적도 없읍니다. 그래서 그 증언을 듣고 제 나름대로 신라 ⸢호텔⸥에 조사를 해보았읍니다. 10월 10일경 유학성씨가 우리 언론인들을 신라 ⸢호텔⸥에 초청해서 저녁을 준 일은 있읍니다.
신진수 위원
그러니까 장기봉 증인이 얘기한 것은 다 거짓이다 이 말씀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이 자리에서 특정인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을 드리지 않겠읍니다.
신진수 위원
증인께서는 자유언론 결의시 부회장으로 사회를 보셨는데 특히 부회장으로 사회를 보신 그 이유는 어디 계시며 또 아까 말씀하시는 가운데서 형식은 자발이었지만 내용은 강제였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렇다면 언론계가 이 사회에 계도해야 할 기능을 갖고 있는 언론이 이런 강제에 의해서 자발을 가장할 것 같으면 일반사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증인께서는 생각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다 제 부덕의 소치라고 후회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의견을 잠깐 드리겠읍니다. 방금 나오기 전에 당시 김종규 서울신문회장이 신문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읍니다. 긴급총회로 열린다기에 안건이 무엇인지 모르고 저는 참석했읍니다. 나가 보니까 사무총장이 김종규회장이 개인사정으로 인해서 나오지 못했으니까 수석부회장인 당신이 사회를 맡아 주셔야 되겠읍니다. 그래 안건이 뭐냐 그랬더니 언론정화에 관한 결의안이라고 그랬읍니다. 그래서 저는 문공부에서 지시되고 사무국장으로부터 수교받은 그 내용을 부의안건으로서 토론에 부쳤읍니다마는 별다른 이의가 없어서 만장일치로 가결이 됐읍니다. 그런데 아까 김종규회장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자기는 잘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박위원께서 칭찬을 했읍니다. 누구든지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있읍니다. 아파서 못나가면은 이러 이러한 사실이 없으니까 자네가 나가서 이것을 대신해주시오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미 모든 세상이 끝나고 변화가 오고 8년후에 와서 어떻게 그런 답변을 할 수가 있겠읍니까? 저는 아주 부도덕한 답변이라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신진수 위원
그러니까 방우영 증인께서는 내용을 찬성해서 임시총회 사회를 맡은 것이 아니고 단순히 모르고 나갔다가 수석 부회장이기 때문에 사회를 하셨다는 이 말씀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바로 그렇습니다.
신진수 위원
언론사라고 하는 것은 보도와 비판과 계도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체 기업이기에 80년도의 상황중에서 소위 먹히느냐 먹느냐의 생사여탈권이 정부에 잡혀있는 상황이라고 모든 핑계를 정부에 돌리고 있는 우리 언론인들 또 언론사 사주들임을 우리는 많은 증인들을 통해서 지켜 보았읍니다. 정부가 보안사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또는 숫자가 얼마이든지 그것을 상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정말 우리 언론인들이 어떤 각오와 신념을 갖고 계도적인 기능 또 언론의 자유와 책임의 기능을 했나 하는 것을 우리 한번 이 시간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언론사측에서는 한결같이 강제해직이나 통폐합의 책임을 당시의 군부세력에 돌리고 있으나 실제 따지고 보면 언론사와 언론사 사주들 또는 증인으로 나와서 언론인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시인했던 우리 일선 언론인들의 공동의 책임이라고 우리 스스로 자성해봅니다. 당시 언론사에서 자신의 권리와 언론으로서의 책임 의무 또 고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국민이나 또는 언론사 언론인 스스로는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 불행한 역사의 단절을 위해 이 자리에서 새 각오와 증언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당시 언론사에서는 자신들의 권리와 언론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였는지 보다는 국민이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세력들이 해주기를 바라고 약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질타하기는 참 잘 했읍니다마는 초권력 앞에서는 오히려 경쟁적으로 '어필'하려는 것 같이 보였던 5공기간 동안의 우리 언론인들 또 우리 사회를 우리 한번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다시한번 빌어 봅니다.
지금까지 우리 언론은 자유가 없었다 또 누구누구 때문에 무엇무엇 때문에 라고 핑계와 상황 속에서 공포에 분위기에서 언제나 핑계를 대고 남의 탓을 대었지만 일부 언론에 대한 비판을 모두 독재권력 탓으로 돌려 버렸읍니다. 즉 자구세력보다는 외부적인 핑계에 더 많은 노력을 더 많은 이유를 붙여 왔읍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했던 과거의 언론 또 절대권력 앞에는 약했던 그 '스트레스'를 오히려 약자에게 내뿜어서 언론의 횡포라는 말이 느껴 지도록 오히려 잘못된 사이비언론이 싹 틀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 5공기간동안 우리의 언론의 상황이었다는 것을 어느 발행인께서 부인하실지 만약 이 사실을 부인하실 수 있거든 어떤 증인이라도 답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언론사는 권력에 순응하는 대가로 각종 특혜를 많이 누려 왔었읍니다. 언론공익자금만 보더라도 81년 이후에 2,810억 이상을 언론공익자금으로 거두어 들이고 그 중에서 1,110억 이상이 언론인을 위해 시혜적으로 쓰여 졌지만 이 언론인들은 정부의 의지대로 그렇게 호락호락 쉽게 말 잘듣지는 않았었읍니다.
또 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언론인들은 무보수로 갑근세 면세점이 대다수였읍니다마는 80년대 초에 대졸 초임이 55만원 거기에 취재수당이 면세가 되어왔던 이 상황속에서 또 각 언론사에서는 언론 본래의 언론발행보다는 온갖 종류의 주간잡지나 전문지 심지어 음악 미술 붓글씨 낚시 꽃꽂이 테니스 축구 등산 관광 김치 각종 강습회 컴퓨터까지 인쇄소까지 다 벌려오는 이러한 언론의 특혜속에서 막강한 그런 언론기업이 되었지만 윤전기 도입할 때도 관세혜택과 감세혜택을 받으면서까지 우리 언론은 기업형성이 되었고 수백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왔었읍니다. 또 거기에 심지어 언론사의 직접 문제는 아니겠지만서도 언론을 위해서 골프장까지 마련된 이러한 상황속이었읍니다.
그리고 또 하나로 우리가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까 박관용 위원께서도 지적했읍니다마는 언론사의 주식소유가 특정인에 과다점유가 되지 않게 되어 있다고 현행법에 되어 있읍니다. 또 매년 한번씩 문공부에 변동결과를 보고하게 되어 있는데 제가 문공부에 알아 보니까 아직까지 몇 년동안 언론사의 변동상황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지 못하고 또 하고 있지도 않다 라고 하는 것을 들어 보았읍니다. 이것 스스로가 언론인들이 특혜를 누리고 업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다 라고 하는 하나의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증인들께서는 한국언론에서 권력과 언론의 유착 권언유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마도 없을 줄로 믿습니다. 만약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증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 언론이 그 동안의 공로와 또 잘못 또 앞으로의 갈길을 스스로 정립해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혹자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읍니다. 국가 사회가 망하는 것은 부패한 것보다는 의인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고 그런 말을 했읍니다. 언론이 정도를 가야 하고 의인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다 같이 언론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또 무엇을 위한 자유를 구축할 것을 바라면서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언론의 책임을 잘 이행해 줄 것을 부탁드리면서 본 위원의 신문을 마칩니다.
위원장 정대철
다음 윤성한 위원 차례입니다마는 지금 자리를 비우고 계십니다. 그 다음 민주정의당 차례입니다. 먼저 민주정의당 신문하시기 전에 한 가지 제가 고지받은 사실을 여러 위원님께 양해를 드려야 되겠읍니다. 김상만 증인과 방우영 증인께서는 지병인 당뇨로 인해서 잠시 잠시 자리를 뜰 수 있게끔 여러 위원님들이 양해해 주십시오. 그러면 다음은 민주정의당 차례입니다. 이상회 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회 위원
민정당 이상회 위원입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중요 언론사 사주가 언론청문회의 증인으로 나오셔서 증언을 하게 된 사실을 본위원은 매우 불행하게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언론사나 언론사의 사주가 모든 비판에서 면책된 성역에 있기 때문이 아니고 언론의 뒤를 샅샅이 파헤쳐 공개한다는 것이 언론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되고 그 결과 언론의 공신력이 떨어지면 민주주의과정에 불가결한 여론의 올바른 형성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언론이 겪고 있는 갈등과 혼란의 진통이 발전적 개혁의 계기가 된다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네 언론사의 사주가 나와 계십니다마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중요한 4대 일간지의 과거의 업적을 되돌아 보면서 그 공과의 대차대조표를 만든다면 저는 한사람의 언론학자로서 과오보다는 공이 컸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읍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일제시대부터 반일제 또 그후에는 반독재투쟁에 앞장을 서왔고 물론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 반일제 반독재와 싸워온 경우도 있고 적극적으로 한 경우도 있읍니다마는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렇게 해 왔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을 해야 될 것이고 그 다음 한국일보의 경우 50년대초에 창간을 하면서 새로운 독자의 기호에 맞는 신문을 만들려고 여러가지 내용이나 외형면에서 애쓴 게 사실이고 또 중앙일보의 경우 60년대에 창간해서 우리나라 신문을 기업으로서 발전시키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짧지 않은 기간동안을 우리가 되돌아보면 과도 없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점에서 본위원은 우리나라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네 일간지가 명실상부한 ⸢엘리트⸥신문으로써 발전을 하는 그런 계기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몇 가지 신문을 하겠읍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제 지금부터는 발전적인 변신을 좀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얘기입니다마는 신문기업이라는 것은 기업임에는 틀림이 없읍니다. 자유민주주의국가의 모든 신문이 기업임에는 틀립이 없읍니다마는 고무신이나 무슨 빵을 만들어 내는 그런 기업과는 다른 기업입니다. 왜냐하면 독자 우리나라 국민이 되겠읍니다. 국민의 지식 사고방식 가치기준 행동양식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인지를 하고 인식을 하는 데에서부터 가치주입을 하고 행동을 하는 유형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신문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네 분께서도 저와 똑같이 느끼고 계실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제가 구체적인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전제로 다지고 들어가야 될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요. 신문이 1차적인 기능이 정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비판하는 데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이나 규제를 또 통제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 되어서 이 1차적인 기능을 너무 강조하다가 보니까 신문의 다른 기능이 다소 소홀히 넘어가거나 외면 당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이 우리나라가 바로 산업사회로 진입이 됐는에 산업사회의 특징이라는 것은 극도로 분화하고 다원화되고 또 복합적으로 조직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 언론이 비판적인 기능을 해야 된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지만 사회통합적인 기능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여러가지 상황조건에 따라서 또 그 나라가 처해 있는 역사적인 맥락에 따라서 언론의 기능이라는 것은 달라져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물론 언론이 자체적인 힘으로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이나 통제 규제를 막을 수 있으면 그이상 더 좋을 일이 없읍니다마는 그러지 못할 경우에 때에 따라서는 이렇게 협조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그렇지 않고 국익을 위해서 국익민복을 위해서 또 협조를 해야 될 때도 있읍니다. 그 사실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만 언론의 기능을 규정하거나 파악하는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 이종기 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전제를 달았읍니다.
그러니까 부당한 간섭은 그것은 막아야 되고 또 거기에 대해서는 저항을 해야 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정치권력과도 국익을 위해서 협조를 해야 될 때도 저는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증인은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저는 조금 전에 이위원이 말씀을 했었읍니다마는 신문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비판적인 기능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국가차원의 이익이 국민이 알아도 될 수 있는 것 같으면 그것은 보도를 해야 되는 것이고 국가차원에서 비밀을 지켜서라도 그것이 나중에 문제가 안되고 국민에게 해가 안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지켜주어야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이상회 위원
저와 똑같은 의견입니다. 좀 구체적인 질문을 몇 가지 제가 하겠읍니다. 1980년에 언론통폐합이 있고 또 뭐 언론인해직사태가 있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고 그간 보도를 통해서 또 이 청문회를 통해서 국민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언론통폐합과 언론구조변화라고 그랬읍니다. 언론구조변화와 언론인해직 또 언론통제사태 등등이 물론 언론사가 주체적으로 원해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아닌데 특히 언론통폐합의 경우 그 결과 어떤 현상이 빚어졌느냐 하면 언론의 과독점 현상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그것은 지금 여기에 나와 계신 네 분 증인이 원한 바는 아니라고 저도 확신을 합니다마는 그것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점은 시인하십니까? 우리 강증인 좀 증언을 해주시겠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아마도 잠깐 말씀드린 바 있지만 저의 경우는 7년간에 외형의 증대는 약 1,000... 3,000억 정도는 됩니다. 실지 이득을 보면 62억으로 2%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업의 이윤에도 사실은 못 미칩니다.
이상회 위원
예. 알겠읍니다. 한국일보의 경우는 그렇더라도 아까 우리 동료위원이 이미 신문을 통해서 밝혔읍니다마는 신문사에 따라서는 신문사의 자본액이 늘어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유리한 고지 수지타산면에서 그래 그 다음해에 바로 큰 폭의 흑자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이위원 제가 한 마디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언론통폐합이 됨으로써 기존 언론사가 막대한 이익을 봤다 공통적으로 위원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문사의 그 외형자체만 볼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그 동안에 80년부터 이 때까지 경제성장이 얼마나 됐느냐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저희 신문의 경우에도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80년도에 저희가 방송을 통폐합을 당했읍니다. 그래서 그 많은 인원을 갖다가 인적손실이라든가 금전적인 손실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읍니다. 그런데 그것을 금전으로 환산한다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막아놓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이 그러한 여러가지 관점에서 저거를 해야지 외형의 성장이 어떻다든지 그런면에서는 저는 의견을 달리하겠읍니다.
이상회 위원
알겠읍니다. 무슨 뜻인지 저는 충분히 납득을 하는데 가령 우리가 단순산수로 하더라도 경쟁사가 10개 있을 때보다도 경쟁사가 4개로 줄어들면 우선은 조건이 과거보다도 유리해졌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저는 수치로 얼마만치 자본금이 늘어났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하여간 조건이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몇 가지 우리 언론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서 이것은 뭐 언론사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마는 자유민주주의체제 또 자본주의체제하에서는 조금 시정이 되어야 되겠다 하고 평상시에 제가 느끼고 있었던 바를 조금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아까 동료위원이 말씀을 한 마디로 카르텔이라는 표현을 했었는데 가령 지면을 똑같이 12면이면 12면으로 한다든가 지가를 3,500원으로 묶어 둔다든가 말이지요.
또 일요일 무조건 아마 잘 아시다시피 일요일 신문 모든 매주 일요일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 나라는 별로 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제가 전공을 합니다마는 이런 것이 독자의 눈에 그것은 카르텔이 아니냐 하고 비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정신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이 자유경쟁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자연도태되어야 된다는 시장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또 더 엄격히 이야기하면 우리 나라의 공정거래법에도 어떤 면에서 아마 저촉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우리 적어도 이 4개의 중요 신문만은 고급신문 엘리트 신문으로 발전적인 변신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런 과정은 겪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조금 지금 당장에는 이 변형 변화에서 오는 진통이 있더라도 좀 제 뜻을 잘 헤아려 들으셔서 수긍을 해주실 부분은 수긍을 해주시고 또 뭐 반대의견이 있으시면 반대증언을 해주셔도 좋습니다.
그 다음 하나 또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나라든지 적어도 기본적인 경제윤리가 통용이 되려면 발행부수 공정제도는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발행부수 공정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은 시장질서을 교란하게 하고 더 심하게 이야기를 하면 수용자라고 그럴까요 구독자를 기만하는 행위로라고까지 혹평을 할 수 있는데 발행부수 공정제도도 이루어지지 않을 만큼 카르텔이 단단한 것이었었는지 방증인께서 좀 말씀을 해주시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이위원께서 아주 좋은 말씀해 주셨읍니다. 독과점 문제에 대해서는 이위원님께서 신문학을 연구하셨기 때문에 언론의 생리 또 지나온 날 언론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가지고 오늘날까지 성장했나는 저보다도 더 잘 아리라 저는 이해하고 있읍니다. 독과점은 한 말로 말하면 20년전까지 저희들이 빈약한 국가이기 때문에 종이가 없었읍니다. 그 당시만 해도 외래용지라고 그랬지요. 정부에 부탁해가지고 정부의 승락없이는 용지를 들여 올 수가 없읍니다. 국내용지 사정이 공급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읍니다. 그래 그 때 신문사 사장들이 뭐를 했나... 물론 권력 앞에 가서 외래지 도입을 위해서 노력을 했읍니다.
그것은 또 당연히 했어야 했읍니다. 신문을 발간하려면 그렇지만 저희들은 제지회사에 사정해가지고 이틀 동안씩 저희들 애걸복걸한 것도 어제라고 저희들은 기억을 했읍니다. 그래서 언론인들이 단결해가지고 이 가난에서 어떻게 빨리 탈피해가지고 우리도 잘 사는 속에서 외래지를 도입해가지고 국내 용지공급을 할 적에는 언론이 그만큼 신장될 수 있다 그래서 독과점은 저희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이 독과점을 통해서 정부하고도 교섭하고 또 용지업자들한테 가서 단체로 압력도 넣고 그래가지고 원활한 공급을 받기 위해서 이 독과점이 시작이 됐읍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루하루 경제성장과 더불어 또 저희 언론들도 신장되고 모든 그것이 연관된 함수속에서 오늘날 독과점은 하나하나 풀어지고 있는 아주 훌륭한 지금 현상이 이루어지고 있읍니다. 아마 이 독과점은 앞으로 지양이 되고 그래가지고 자유스러운 경쟁이 머지않아 도래되리라 저희들은 기대하고 또 그렇게 희망을 하고 있읍니다.
이상회 위원
저희는 전문적인 용어로 ABC라고 그럽니다마는 이 발행부수는 공정제도는 이것도 정착이 되어야 되는 것 아니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이 자리에 계시는 우리 위원님들께서 이것은 꼭 좀 실행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읍니다. 오늘날 ABC가 이루어지지 않고 부수공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언론계에도 지금 적용되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겠읍니다.
이상회 위원
그 다음 시간이 없어서 제가 질문할 것이 많습니다마는 좀 줄이겠읍니다. 줄이고 지금까지 신문외적인 모순이라고 그럴까요 문제점을 제가 몇 가지 지적을 했읍니다. 하나 더 생각나는 김에 제가 좀 물어보아야 되겠는데요. 저는 언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언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언론 종사자들의 보수가 다른 직종보다도 절대로 많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래야 자기가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할 수 있고 또 그것이 격무라는 것도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우리 언론 종사자들이 받는 봉급수준이 다른 직종에 비교해서 지금 어떤 수준입니까? 우리 김증인께서 좀 말씀을 해주시겠읍니까? 높은 수준입니까 중간수준입니까 낮은 수준입니까? 그것만 좀 말씀을 해주시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나는 동아일보 일과 학교 일밖에 보지를 않고 다른 기업체일을 전혀 관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회 위원
알겠읍니다. 우리 이증인께서는 삼성그룹이 원체 방대하고 큰데요. 지금 '매스컴 센터'가 되겠읍니다. 신문사의 봉급수준이 다른 기업의 수준과 비교해서 상중하로 갈랐을 때 어떤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지금 요새 신문사에 들어오는 기자의 능력이 워낙 있기 때문에 능력으로서는 평가를 할 수 없겠지만 수준은 상쪽에 속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이상회 위원
예. 알겠읍니다. 지금부터 신문내적인 문제점이라고 그럴까요. 모순점에 대해서 몇 가지 제가 물어보겠읍니다. 우리나라 신문을 평할 때 제일 먼저 지적하는 것이 내용면의 획일성을 이야기를 합니다. 획일성이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읍니다마는 편집의 획일성 또 시각과 입장의 획일성 또 뉴스 밸류라고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뉴스 가치기준의 획일성 여러가지가 있는데 제가 알기로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자유스럽게 유통이 되게 하려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신문이 나와서 시각과 입장이 다르고 모든 면에서 다른 신문이 나와서 혼재해야 비로소 자유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우리 신문을 이렇게 보면 편집면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사안이나 현안에 대한 시각과 입장에 이르기까지 획일적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또 신문사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신문의 사설이라는 것은 신문사의 주의 주장을 펴는 개진하는 난이 신문사설인데 왜 다른 신문이 그렇게 획일적인 주장을 하느냐 하는 것이 참 불만입니다. 가령 이 예가 잘 못되었는지 모르겠읍니다마는 공산주의국가에도 복수의 신문이 있읍니다. 여러가지 신문이 있는데 바로 제가 지적한 것 같이 그 획일성 때문에 여러 종류의 신문이 있어도 여러 종류의 신문이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방증인께서 이런 획일성은 탈피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획일성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획일성에 대해서는 지난날 많은 비난을 받고 왔었다는 것을 더 잘 알고 계시리라고 저는 믿고 있읍니다. 획일성이 왜 생겼느냐… 지난 8년동안 항상 대통령 사진은 신문 왼쪽에 올라갔읍니다. 또 같은 광고가 5단으로 같은 장소에 게재가 되었읍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독자가 볼 때는 신문은 다 획일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신문을 만들 수 있느냐 그런 비난을 저희들은 하루에 열번도 듣고 왔다는 것을 긍정했읍니다.
이상회 위원
우리 나라와 같이 민주화가 되는 나라 또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러나 구석구석마다 각 신문들이 자기 주장이 어느 구석구석 하나에 다 들어가 있었다고 저는 또 주장하고 싶습니다. 어느 구석에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 크고 작고 간에 2면에는 우리가 주장하고 또 독자들이 알고 싶은 것이 3면 4면 어디 구석구석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주의깊게 읽어 주신 독자는 이해해 주시리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이상회 위원
예. 질문의 각도를 조금 달리하겠읍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권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씀을 드리면 우리 나라와 같이 이렇게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에서 또 민주화가 되면 될수록 또 극좌의 신문에서부터 진보적인 신문도 있어야 될 것이고 또 중도적인 신문도 있어야 될 것이고 우익적인 신문도 있어야 될 것이고 극우의 신문도 있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그 정보가 의견이 자유스럽게 유통될 수 있고 자기 취향에 따라서 자기 주의 주장에 따라서 독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신문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방증인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이상회 위원
그렇게 다양한 신문이 나와야 되겠죠?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그래야 민주주의가 발전…
이상회 위원
종교신문도 나와야 될 것이고… 다양한 종교신문도 나와야 될 것이고 노조신문도 나와야 될 것이고…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물론입니다.
이상회 위원
그런데 지금 우리 실정에서는 그렇게 다양한 신문이 발행되고 있지 않다 하는 것이 우리나라 신문창달을 위해서 좀 저해가 되는 게 아니냐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장증인의 저의 의견에 동감을 하십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동감을 합니다.
이상회 위원
예. 제가 직업이 그래서 신문사에 자주 출입을 하고 했는데 신문사에 가보면 사시라고 이렇게 내걸어 놓고 있는 것이 있는데 대개 보면 불편 부당 시시비비 절대중립 그런 사시가 많이 걸려 있읍니다. 사시라는 것은 창간호의 사설과 같이 그 신문사가 지향하는 방향을 독자에게 예시하고 있는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일종의 지표가 되는데요. 저의 의견으로는 사시가 신문사의 사시가 이제는 불편부당 무슨 시시비비는 좋습니다마는 절대중립하는 것은 적어도 현대신문이 엘리트 신문이 지향할 바는 아니다 그것은 뭔 말이냐 하니까 보도면에서는 객관성을 기하고 공정성을 기하고 진실보도를 하고 사실보도를 한다는 것은 제가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읍니다마는 그것은 저널리즘의 ABC입니다. 기본윤리인데 그것을 가지고 제가 말씀드리자는 것이 아니고 신문이 공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는 문제가 제기되고 생겼을 때에 그 문제에 대해서 그 현안에 대해서 주의 주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문사의 독자적인 시각에서 입장에서 주의주장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절대... 불편부당 이것은 좀 문제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가령 제가 외국의 신문의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마는 대통령선거때는 어떤 당의 누구를 지지한다 사설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가령 무슨 추곡수매가격의 경우에 우리의 주장은 어떻다든가 다양한 의견이 좀 개진이 되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조금 주제넘은 질문이 되겠읍니다마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불편부당이라는 것이 그것이 가령 객관적인 보도 뭐 공정한 보도를 한다는 의미라면 100% 받아들이겠읍니다마는 사실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신문사의 독자적인 의견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방증인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저희 신문사에도 사시가 있읍니다. 또 그 사시 속에 불편부당을 부를짖고 있읍니다. 그래서 저희는 1년에 테에마 기사를 내고 있읍니다. 신년초에… 작년에도 저희는 그러한 사시에 준해가지고 자유민주주의제도를 지키면서 안정을 희구하는 중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또 그런 속에서 민주주의적인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독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겠다고 봉사를 다짐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사시에 준해서 그런 명제가 각 신문사마다 지금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아주 저는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있읍니다.
이상회 위원
조선일보의 경우는 안정을 희구하는 중간계층의 초점을 맞추어 놓고 있다 하는 그런 말씀으로 해석을 해도 괜찮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이상회 위원
예.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신문 컬러가 두드러지고 또 신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모든 계층 모든 집단을 전부 충족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신문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오늘 같은 이렇게 다양화되고 분화되고 복합적으로 조직화된 분업사회에서는 그렇게 모든 계층 모든 집단의 욕구와 원만을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신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신문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통폐인데 신문이라는 것이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겠읍니다마는 매우 미래 지향적인 것이 되어야 되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감시해서 처방을 규정해 주므로 미래에 대한 처방을 해주는 것이 신문의 주기능이 되어야 될 것인데 우리 신문은 좀 과거지향적이라는 평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잡지성 신문이라는 그런 혹평까지도 있어왔었는데 제가 아까 서두말씀을 드린 엘리트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구태의연한 과거의 관행이라고 그럴까 신문제작 방법에서는 과감하게 좀 탈피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인데 장증인은 제 생각에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너무 많은 말씀을 들어서.. 어떤 말씀인지 모르겠읍니다.
이상회 위원
신문이 과거 지향적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잡지형에... 그러니까 앞을 미래를 처방해 주고...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글쎄 뭐 위원님의 말씀이 맞는 말씀이겠지요.
이상회 위원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신문의 정치 가십이라는 것 말이죠 세계 그런 정치 가십은 싣는 신문이 없읍니다. 세계 엘리트 신문을 다갖다 놓고 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치가 가십이 되어서는 안됱다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는...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70년초까지 정치 가십란이 있었어요. 지금은 없어졌읍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 정치가 정도의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정치 가십란 같은 것이 과감하게 철폐되어야 조금 심도있는 뭐 논리를 전개할 수 있고 또 논리가 있는 사람이 통용되는 이 사회가 되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혹시 이증인께서는 이런 정치 가십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해보신 일이 있으시고 그것을 없애야 되겠다고 생각을 해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저희가 신문을 보게 될 것 같으면 아까 획일성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정치는 반드시 1면 톱으로 나와야 되는 것이 상식으로 되었읍니다. 2면은 경제면이 되고 인세 끝의 16면은 TV 알림면이 되겠고 15면은 각사말할 것 없이 사회면으로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치에 대해서 전체 우리나라 국민들이 너무 관심이 많기 때문에 부득이 오늘 청문회도 뭐 내일 아침이 될 것 같으면 청문회기사가 아주 면면을 할애해가면서 나갈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것이 국민이 희구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고 현재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이상회 위원
저는 좀 전향적인 자세에서 좀 선도적인 입장에서 제가 여러 가지 언론의 기능이 있는데 독자의 기호나 취향에 맹목적으로 영합하는 것만으로는 엘리트신문이 되기가 어렵지 않느냐 그런 뜻입니다.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그런 면이 차차 줄어들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이상회 위원
예. 감사합니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읍니다. 지금 우리 언론이 큰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처럼 나와주셨으니까 국민여러분이 지금 다 시청을 하고 계시니까 우리 언론의 구조내의... 인스트락쳐 구조내에 심한 이 갈등이 있읍니다. 그것은 뭐냐 하니까 가령 경영권과 편집권과 쟁의권의 문제인데 제 개인적인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려면 경영권은 경영권대로 분리가 되어야 될 것이고 편집권은 편집권대로 독립이 되어야 될 것이고 또 쟁의권은 쟁의권대로 인정이 되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가지가 구획이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외국의 경우를 또 예를 들겠읍니다마는 영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은 쟁의 노사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았읍니다마는 그런 우리가 민주화 과정에서 이런 지금 홍역을 치르고 또 열병을 앓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방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편집권에 대해서 물으신 것 같은데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편집권은 아주 중요한 문제올습니다. 편집권은 내부의 압력 권력으로서의 간섭 또 비토 세력의 간섭 또는 이익집단의 반향 이러한 모든 면에서 언론에 있어서 편집권은 반드시 보장이 되고 또 보장해서 이 문제는 앞으로 이자리에 계시는 위원님 여러분들 또 저희 언론계 학계가 진지하게 편집권의 위상을 어디다 두겠느냐 한번 기회를 가지고 오랜 시간 연구를 해 주시고 검토해 주시고 좋은 판단을 내려서 결정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읍니다.
이상회 위원
감사합니다. 저의 신문을 끝마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솔직히 무언가 좀 답답합니다. 질문이 아닌 질문 답을 구하지 않는 질문 너무 포괄적이고 막연한 질문 유설형 질문 강의용 신문 공치사형 신문 가능한 한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증인들께서도 좀더 성실한 답변을 하시기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자리가 누구에게 보복하거나 응징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해서 국민과 역사앞에 구하고 옛날 껍데기를 벗어나서 새로 태어나서 이나라의 자유 언론의 올바른 위상을 정립하는 자리라고 이사람은 생각하고 있읍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정말 노력하십시다. 뭔가 좀 답답한 심정에서 한 말씀 드린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민주정의당 이병용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병용 위원
민정당 이병용 위원입니다. 저는 하도 금쪽같은 시간이기 때문에 인사말은 다 빼겠읍니다. 바로 신문하겠읍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오늘의 주제가 언론인의 해직에 각사 사장님들 사주들이 어떻게 개입되었느냐 하는 것이 가장 문제의 초점이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80년 7월경에 그 당시 신군부세력에 의해서 실권을 행사하던 데가 여러 사장님들이 아시다시피 국보위 문공위원회입니다. 그 국보위 문공위원회에서 언론계자체의 정화계획 물론 대외비입니다마는 이것이 우리 당 공보위원회에 나와 있읍니다. 그런데 이 언론계자체정화계획은 말하자면 자율적으로 하는 것처럼 해서 사실은 타율적으로 하면서 자체정화계획이라 이렇게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가장 우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 지금까지 해직된 분들의 얘기 또는 보안사가 직접 개입했던 사람들 얘기 이런 데서 보면 200여명은 거기서 했고 실지로 해직된 것은 700여명 900명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딴 데서 요구되어 온데다가 겹치기로 회사에서 신문사에서 많은 미운 놈 내쫓은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첫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오신 네 증인들한테는 우선 그것부터 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 언론계자체정화계획을 이종기 증인한테 좀 보여 드리겠어요. 이것 좀 빨리 누가 전달해 주어요. 여기에 보면 말이지요. 정화의 뭐 당면목표하는데 그 집행계획이 제1기 제2기 제3기 이렇게 나누어져 있어요. 제일 밑장을 먼저 봐요. 떨어져 있는 것 제일 밑에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 보신 일 있으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본 일이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것이 언론사에 그렇게 왔던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이것이 어떻게 됐느냐 하면...
이병용 위원
대외비니까 누가 가지고 왔겠는데...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이것이 제가 전무되었을 때인데 그 당시에 협회에서 결의를 해 가지고 이 공문이 회사에 왔었읍니다.
이병용 위원
대외비인데?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그렇읍니다.
이병용 위원
언론기자 대외비라는 것은 일반직원들이나 이런 데는 보이지 말라는 그런 뜻인데...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그래 금방 가져와 가지고 이것은 대외비니까 가지고 가야 되겠다 그래서 가져간 것입니다.
이병용 위원
쓱 한번 보기만 하고 도로 가져갔구만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그렇습니다.
이병용 위원
거기에 보면 제1기 제2기 이렇게 하고 또 안 될 때는 제3기는 합수반이 직접 담당해 가지고 정화계획을 실시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첫째 우선 이종기 증인한테 여쭈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중앙일보나 TBC는 보안사나 문공부 등 이런 당국에서 요청되어 본 인원에다가 회사 나름대로 겹치기를 붙여서 해직시켰읍니까? 아니면 온 숫자대로만 했읍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온 숫자대로 했읍니다.
이병용 위원
온 명단만 했다?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그렇습니다.
이병용 위원
그러면 그때 당시는 중앙일보하고 TBC하고 몇 사람이나 되었읍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전부 다 1,620명 있었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러면 중앙 지방 합쳐서 얘기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중앙일보 전체입니다.
이병용 위원
중앙일보?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이병용 위원
또 그때 TBC도 있는데...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아 중앙일보 동양방송 같이 합해서 그렇습니다.
이병용 위원
합해서... 그러니가 중앙 및 지방까지 다...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지방도 같은 본사 회사였으니까 말이죠.
이병용 위원
예. 다...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이병용 위원
그리고 어떻습니까? 조선일보는 아까 말씀이 퍽 적다고 그랬지요? 방우영증인!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적다는 것이 고맙다고 말씀드렸읍니다.
이병용 위원
아 글쎄 고맙고 안 고맙고 간에 조선일보는 아까 10 몇 명이라고 그랬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예. 17명입니다.
이병용 위원
동아일보는 몇 명입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동아일보는...
이병용 위원
알겠어요. 시간이 걸리는데 이동욱참고인이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문공부에서 온 것이 26명 보안사에서 직접 온 것은 지방주재기자들 그것은 보안사에서 직접 왔읍니다.
이병용 위원
아 그러니까 중앙은 문공부에서 26명이 왔고 지방은 보안사에서 직접 했다...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예. 보안사에서 전부...
이병용 위원
알겠읍니다. 또 한국일보는 어떻습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3·4차에 걸쳐서 한 40여명 중에서 실제 해직된 사람은 30명입니다.
이병용 위원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조사가 미진해서 그런지 어쩐지 모르지만 보안사관계 사람들이 지금까지 한 것은 최대한 200여명입니다. 그랬는데 언론인해직은 700명 900명이란 말입니다. 그 사이가 많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지 어디 장강재증인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타사의 경우에 제가 설명을 하면 주제넘는 것 같은데 제가 느끼기는 지방회사의 그 기자 또는 퇴직 이런 것이 포함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최소한도 그 4대지에는...
이병용 위원
알겠읍니다. 조금 전에 최세경 사장이 나와서 증언하는 데어서 우리가 많은 힌트를 얻었기 때문에 여러 증인들한테 한번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하겠읍니다. KBS 최세경사장은 60명은 문공부에서 내려왔고 또 보안사가 40명 내려왔고 그러면서 옆에서 전체 KBS직원 3,000여명의 10%를 쳐야 하니까 300여명을 정리해라 이렇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에 이것만 해라 이것이 아니고 문공부를 통해서 이렇게 내려오고 나중에 보안사를 통해서 이렇게 내려오고 이래서 그후에 자꾸자꾸 추가가 되어서 그 인원이 700명 내지 900명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 번에 보안사의 증인이나 이런 사람들로 갖고 해서는 명단이 처음에는 8·90명이었다 100명이었다 아무리 늘려보아도 200여명밖에 안되는데 실제 해직된 것은 700여명 이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보안사가 그후에 추가로 자꾸 늘어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되는데 어때요? 장강재 증인 아까 세번 네번에 긍해서 왔다고 그랬지요?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예. 분명히 7월...
이병용 위원
좋습니다. 이종기 증인은 몇번이나 해서 왔나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저희가 처음에 올 때는 30명이 왔읍니다.
이병용 위원
예. 그랬다가...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그리고 2차에 지방주재기자를 4명이 보안사에서 연락이 왔읍니다. 그래서 전부 34명입니다.
이병용 위원
또 조선일보는 한번 오고 두번 안왔나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3차에 걸쳐 왔읍니다.
이병용 위원
아 3차에 걸쳐 왔다... 어디 동아일보는 몇 번에 걸쳐서...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동아일보가 제가 기억하기로는 3차로 기억하는데 7명이 오고 3명이 오고 맨나중에 한번 오고 그것은 그렇게 기억을 합니다.
이병용 위원
여하튼 네 신문사가 그때는 중앙일보의 경우는 TBC까지 포함해서인데 그쪽에서 자르라고 하는 인원에다가 겹치기로 붙인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외부에서 온 명단에다가 회사에서 이것 이 기회에 미운 놈 이것들 좀 자르자 그런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한번 확인을 하자는 것입니다.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한국일보의 경우는 한 명도 없읍니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전혀 없읍니다.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제가 아까 말씀대로 없읍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없읍니다.
이병용 위원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 방우영 증인에게 여쭈어 보겠어요. 80년 5월 20일 그러니까 광주사태가 막 났을 때 입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사장들을 초청한 모임이 있었다는데 그때 그 장소에 가셨다고 했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저는 5월 10일날 아프리카 출장을 갔다가 6월 8일날 서울에 돌아왔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러면 참석하신 일이 없구만요? 어떻습니까? 김상만 증인은 참석하셨읍니까?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그때 제가 참석했읍니다.
이병용 위원
아! 참고인이 참석했읍니까? 그 다음에 장강재증인은...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저도 해외출장중이었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때는 전무이시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에. 전무였읍니다. 저는 안갔읍니다.
이병용 위원
거기서 광주사태에 대한 설명을 하고 또 참석한 신문사 사장들한테 조금 엄포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데 그렇습니까? 그런 기억이 없으십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밝혀야 할 일이 아까 시일을 고치셨는데 방우영증인한테 확인하고 싶었어요. 80년 10월... 원래 장기봉증인이 신라호텔에서 초청을 해가지고 여러 가지 신문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어느 조간신문의 사장께서 신문에 대해서 좀 정리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이러한 말을 했다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이렇게 나와 있읍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 우선 그 모임의 일시가 80년 10월 13일 중이라고 하셨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10월 10일 이전이라고 기억이 납니다.
이병용 위원
10월 10일경... 그리고 그것이 신라호텔에서의 만찬이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게 기억하고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런데 물론 장기봉증인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 자리에서 방우영증인은 그것에 대한 것을 해명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조간신문 사장이 뭐 꼭 조선일보만 조간신문이 아니니까 조간신문 한다면 유력한 조간신문이 두 개밖에 없으니까 우선 방우영증인은 그때 유학성 중앙정보부장한테 이런 말을 하신 일이 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모사장이 증언석상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저도 분명히 텔리비젼을 통해서 들었는데...
이병용 위원
여기서 그런 말이 나왔기 때문에 해명하실 일이 있으면 해명을 하십사 하는 것입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예. 그 다음 날 일간신문에서 톱으로 모조간신문이 언론을 정비하라고 그렇게들 보도를 해서...
이병용 위원
글쎄 그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해명을 해주십사 하고...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엄청난 충격을 받았읍니다. 당시만 해도 언론통폐합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계를 선풍같이 휩쌌고 모든 저희 사장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충혈된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제가 어떻게 그 발행인들 앞에서 신문을 정비하라고 말씀을 했겠읍니까?
이병용 위원
그런 일은 없다 또 그런 말을 할 정황이 아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것은 상상조차... 어떻게 그러한 이야기를 할는지...
이병용 위원
또 한가지는 오해일는지는 모르지만은 여기 앉으신 네 신문사 사주중에 우연히도 보니까 동아일보는 언론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을 뺏겼고 또 중앙일보는 TBC라는 아주 거대한 방송 미디어를 뺏겼고 또 한국일보는 서울경제신문이라는 일간자매지가 반납하게 되고 그랬는데 조선일보는 그런 말하자면 직접적인 피해가 없어요. 그 이유는 그런 것 뺏길만한 것이 없으니까 방송도 한 것 없고 자매경제지도 일간지 가지고 있는 것이 없고 그러니까 뺏긴 것 없는 것이 아닙니까? 내 생각은 그런데 어떻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사실 제 능력이 부족...
이병용 위원
만일에 조선일보도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와 같이 방송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거기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경영능력이 부족해서...
이병용 위원
아니 그러니까 가정해서 물어보는 것이에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조부때부터 조선일보 하나밖에 없었읍니다. 저는 텔레비젼도 없고 또 라디오도 없고 자매지도 없고 오직 조선일보 하나만을 경영했읍니다. 68년 된 민족지의 조선일보를 뺏을 수 있겠읍니까?
이병용 위원
그러니까 아까 내가 그렇게 물어 볼 때 아무말도 안 하니까 내가 답답해서 물어 본거예요. 만일에 있었다면 뺏길 것이 아니냐 하고 내가 물어본 것입니다.
중앙일보는 이종기 증인한테 물어 보겠어요. 80년 5월초에 중앙일보 강원도 장성 주재기자에 탁경명 기자를 기억하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기억하고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 탁경명기자가 말이지요. 그때 사북사태가 시끄러웠는데 사북사태 취재중에 수사요원들에게 뭇매를 맞고 그런 사실이 있는데 그것 알고 계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알고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런데 중앙일보에서 "동원탄좌광부연행을 취재하던 기자 수사요원이 뭇매를"라는 기사를 보도하려고 했다가 그것이 검열과정에서 삭제된 일이 있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물론 그때 당시 계엄사태이고 계엄하에서는 사북사태가 퍽 험악하고 긴박한 상태였으니까 계엄당국으로서는 그것을 못 내게 했을 것입니다마는 그렇다고 취재자를 가서 뭇매를 때리고 또 폭력을 했다고 하는데 대해서 신문사 또는 방송 간부 내지는 일반사원들은 어떻게 대처하셨읍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간단히 말씀 드리겠읍니다. 80년 5월 6일날에 그런 사건이 있고 나서 곧 바로 중앙일보에 백지사건이 있었읍니다.
이병용 위원
백지사건이라는 것이 뭐예요? 기사를 못 내게 하니까 그 난을 비워버렸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1판에 그것을 비웠었는데 검열에서 삭제가 돼가지고 백지로 신문을 발간을 했읍니다.
이병용 위원
바로 그 난이 이 난인가요? 이 기사란인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그렇습니다.
이병용 위원
그래 가지고 그 후 검열당국에게 어떻게 되었읍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그래서 2판에 사실보도만 하게끔 그렇게 되었었고 그 이후에 계엄사령관이 그 당시에 김승한 주필이라고 문책을 하겠다고 하면서 사과했다고 하는 전화는 받았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러면 실지로 문책이나 어떠한 불이익은 안 받았나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누구 말입니까?
이병용 위원
김승한 주필이...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김승한 주필은 그 뒤에 회사를 떠나는 과정이 또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런데 이때 당시로서는 김승한 주필은 어떻게 의원사직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그렇지는 않았읍니다.
이병용 위원
방우영증인한테 오해를 풀기 위해서... 80년 10월에 말이지요. 언론계 대표로 해서 입법회의의원이 되셨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예.
이병용 위원
일부에서는 조선일보 출신이었던 당시 3허씨라고 하면 상당히 5공 창업과정에서 일등공신들인데 허문도씨 추천에 의해서 증인이 입법회의의원이 됐다 이런 말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런 일 없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입법의원이 되셨나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국보위로부터 수차례에 걸쳐서 권유를 받았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러면 그때 신문사 사장들이 많이 되셨나요? 언론계 대표로서 증인만 되신 것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일간신문사 대표로서는 대구매일사장이신 전달추씨 그리고 서울에서는 저 그리고 MBC 경항신문사장으로 있던 이진희씨 이 세분이 참여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입법회의에 가신 것은 결국 그러니까 본인 희망도 아니고 신문사 대표로 해서 그쪽에서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마지 못해서 한것이다 그 말씀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그대신 각계각층에서 직능대표로...
이병용 위원
대학총장도 있고...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조선일보가 발행부수도 많고 영향력도 있으니까 아마 저를 지목하고 강요했지 않았겠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아까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던 사람은 거의 다 복직시켰다고 했는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아니요. 그렇게 말씀 안드렸읍니다.
이병용 위원
그러면 복직시키려고 노력하고 계십니까? 해직된 사람들을...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80년도 말씀입니까? 본사기자는 네 사람이었읍니다. 한분은 캐나다로 이사갔고 이원석 기자는 현재 한겨레 신문사 기자로 있고 그리고 정규만 기자는 현재 저희 신문사 총무부장으로 있고 그리고 김형배 기자는 현재 한겨레 신문사에 재직하고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알겠읍니다. 아침에 김 모증인께서 나와가지고 동아일보의 박권상 논설주간이 그전에 삼선개헌반대도 해서 그대로 유지했는데 국보위를 찬동하는 그런 사설을 쓰라고 했는데 그것을 끝끝내 거부한 것이 빌미가 되어가지고 해직이 되었다는데 어떻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예.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것은 제가 말씀드리겠읍니다. 80년 7월 28일인가 29일에 박권상씨를 그만두게 하라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이병용 위원
그 이유가 국보위를 찬양하는 그런 사설을 쓰라고 했는데 응하지 않았다는 데서 그렇다고 김 모기자가 와서 그렇게 말했는데...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 이유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우리는 박권상씨를... 당시에 논설주간으로 있었읍니다. 그랬는데 동아일보에 안보통일문제연구소라는 기구가 있어요. 거기에 상임고문으로 발령을 했읍니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8월 8일 해직하라는 지시가 와서 할 수 없이 해직시켰읍니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이 하나 있는데 김기현 논설위원이라고 있었읍니다. 그분도 짤라라...
이병용 위원
이것은 오전에 김 모기자라고 그 사람이 자유언론 투쟁을 위해서 자기네들이 존경하는 이런 분에 대해서 그랬다고 했는데 좋습니다. 그러면 박권상 그 분을 그후 어떻게 복직시키거나 어떻게 노력하신 일이 없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여러번 시도를 했지요. 그런데 정년이 지났고 하니 자유기고자로서 글이나 쓰겠다고 그래가지고 한 달에 두서너 번씩 글을 기고하고 있읍니다.
이병용 위원
알겠읍니다. 그것은 오전에 김 모기자 말은 자유언론을 위해서 투쟁하던 그런 사람을 그 5공 그 당시에 내쫓았다면 이제 제일 먼저 그런 분부터 복직을 시켜야 할 텐데 동아일보 같은 데는 안 시키고 있다 그것은 결국 사주나 경영진들의 정신이 아직 자유언론에 대한 의지가 약한 것이다 하는 것처럼 말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제가 여쭈어 본 것입니다. 또 여러가지 묻고 싶은데 저희들이 시간이 제한이 돼서 준비한 것을 묻지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서둘러서 묻고 단문단답식으로 해서 혹시 실례가 됐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민주정의당에 할당된 시간 5분에다가 또 8분을 더 드렸읍니다. 지금 남아계신 위원이 함종한위원이 계신데 이따 아무래도 자정은 조금 넘길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까? 그러면 다음은 평화민주당 순서입니다. 박석무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박석무 위원
오늘 오전에 여러 증인들이 오셔서 증언을 했는데 해직을 당했던 경험있는 분들이고 또 개중에는 오랫동안 신문사에 계셨고 또 기자협회에서 기자협회보를 만드는 편집국장으로 계시는 분도 오셔 가지고 80년 언론인들의 학살이라고 말하는 그런 엄청난 사태에 대해서 여러가지 정황증거로 볼 때에 당국에서 내려 보낸 소위 말하면 권력에서 싫어하는 언론인들을 해직시킨 것 이외에도 반드시 사회에서 몇 명씩은 이렇게 추가해 가지고 해직시킨 것을 거의 확실하게 믿는다라는 그런 증언을 했었고 근래의 이 언론통폐합 기자해직 또 80년대의 언론통제문제에 대한 각 신문사의 특집 시리즈라 해서 특별취재반을 만들어서 구성했던 것도 월간지 주간지 등 잡지에 많은 기고가들이 글을 쓰면서도 대체로 언론인해직에는 사주측 아니면 사주측에 몇 명씩은 전부 추가해서 했다 이러한 증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오늘 이 네 분 증인들을 모셔놓고 증언을 듣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핵심은 바로 그 부분입니다. (정대철위원장, 함종한간사와 사회교대)
그 외에도 추가해서 물을 것도 있고 80년대 언론상황이라든지 더 나아가서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75년도 그 수많은 기자들의 해직문제까지 이것이 제도언론의 뿌리가 돼가지고 80년대에는 완전히 언론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해직도 시켰고 통폐합도 이루어졌고 또 그래서 80년대 이래로 계속 이 막된 군부정권이 정권을 유지하도록 지탱해 준 그런 사실들이 이 언론사에 있다 이런 것들이 논의가 됐기 때문에 또 그런 세론이 있고 또 어떤 면은 사실인 것 같고 해서 그 진상을 밝히자고 오늘 이 늦은 밤에 여러분들의 증언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분 증인께서는 한결같이 위에서 내려온 명단에는 하나도 더 추가해서 해직시킨 것이 없다 정말 이렇게 된다면 저희 청문회에서 나타난 대로 뭐 크게는 700명 이상 작게는 500명 이상의 언론해직자들의 언론인해직문제가 영원히 미궁에 빠질 이런 위험에 도달해 있읍니다. 따라서 어떻든 본위원은 여러 증인들께서 지금까지 말하시는 모습을 볼 때 진실을 같은 것으로 느껴지지만 이것이 진실이라면 다행지만 여기에 계신 증인들조차도 진실을 말하지 않아버린다면 이것은 정말 우리나라 언론인이 치욕의 역사를 치유하고 앞으로 더 개선해 나가고 다시 태어나는데 이것은 중대한 장애가 되겠다... 그래서 저는 신문에 앞서 우선 답답한 생각을 금할 수가 없읍니다. 우선 대체로 동료위원들의 질문속에 본위원이 묻고자 하는 것도 대개 거론이 되었읍니다. 그런 중에서 미진한 것 또 아직 거론 안 된 것을 중심으로서 몇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우선 방우영증인께 묻겠읍니다. 75년도 해직언론인문제에 대해서 동아일보사에 대해서는 동료위원이 질문을 했는데 방증인에 대해서는 아직 질문을 한 위원이 없었기 때문에 본위원이 묻습니다. 어제 조선일보에서 지난 75년에 해직당해가지고 오랫동안 언론자유화운동을 했었고 몇 차례 옥고도 치렀고 그러면서 지금은 한겨레신문사에 가 계시는 신홍범증인은 그 당시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기자입니다. 증인 기억하시는지요? 그 분을 통해서 사실로 인정받은 것이 이 조선일보 사태의 진상입니다. 이것 아마 시리즈로 나왔는지 여기 보면 기1 이렇게 나와 있는데 그 후로도 있는가 모르겠는데 본위원이 입수한 것은 이것 하나가 있읍니다. 이 날짜도 75년 4월 5일로 되어 있고 거기에 해직된 34명의 명단이 다 나와있고 이 중에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도 몰라서 어제 본위원이 신홍범증인에게 이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여기에는 거짓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기에서 여러가지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자유언론의 적은 권력쪽 즉 말하자면 외부세력이 아닌 내부에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이것은 80년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는 그런 생각을 본위원은 합니다.
75년 34명의 조선일보 신문기자들이 해직이 되는 데 대해서 지금 방증인께서는 외부세력이었는지 아니면 내부에서도 좀 호응을 한 것인지 이 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세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3·6사태는 한마디로 1975년 조선일보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이었고 또 가슴아픈 사태였다고 저는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박석무 위원
그 때는 외부세력은 전혀 없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없었읍니다. 그 때 우리 편집국 기자들이 신문발행을 중단하고 총파업에 들어갔읍니다. 만약 그 당시 조선일보가 발행을 중단했다면 누가 좋아 했겠읍니까? 아마도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3·6사태는 분명히 내부적인 우리 사원들의 갈등이요 가슴아픈 비극이었읍니다.
박석무 위원
전연 외부의 간섭이 없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내부적인 문제입니다.
박석무 위원
내부문제다 그러면 증인께서는 그 내부의 문제로 34명이라는 기자해직이 나왔는데 그 분들을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던 분들로 여깁니까 아니면 조선일보의 발행은 그만두자고 했던 사람들입니까? 그 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언론자유 수후 이것은 모든 언론인들이 오랫동안 부르짖었고 또 그동안 부르짖어가지고 오늘날 성취가 되었다고 봅니다. 조선일보도 예의가 아닙니다. 조선일보 모든 기자들이 언론 문제는 방법론에 있었읍니다. 일부는 대다수 우리 편집국 사원들이 문들 닫고 투쟁하자 그래서 저희들은 언론 본연의 사명인 신문을 중단하고 어디 가서 어떻게 언론자유를 부르짖을 수 있겠읍니까? 또 제가 방금 말씀대로 조선일보가 문을 닫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읍니까? 그것은 바로 권력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우리 사원들한테 제가 이성으로 설득하고 또 동지적인 면에서 애소를 했읍니다. 이 사태는 박위원님께서 잘 아실지 모르지만 한달동안 계속되었읍니다.
저희들로서는 글자 그대로 피나는 고통을 한달동안 겪었읍니다. 그래서 신문 폐간을 하지 말고 들어와서 신문을 만들자 우선 신문을 발간하면서 한발자국 한발자국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이것이 언론을 우리가 쟁취하는 하나의 지름길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저희들은 주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문 제작을 거부하고 농성을 계속했고 또는 저는 경영인의 한 사람입니다. 만약 그 당시 조선일보가 폐간되었다면 조선일보 1만명의 가족이 길바닥에 나가게 됩니다. 그 분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저는 신문은 절대로 휴간할 수도 없고 발간을 중지할 수도 없다고 한달동안 부를짖었읍니다. 그런데 우리 기자들은 끝끝내 복귀를 거부하고 한달동안 투쟁을 계속했읍니다. 그 한달 후에 68명 기자 중에 대부분은 들어 왔고 그러한 아주 엄청난 가슴아픈…
박석무 위원
되었읍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답변해 주셔야 이야기가 되겠읍니다. 그렇다면 지금 증인 말씀을 들어보면 당시 해직된 34명은 신문 조선일보 제작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박석무 위원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서 하루 이틀 신문을 못 내더라도 우리가 자유를 쟁취하자라는 뜻이엇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조선일보를 문닫자는 것이었을까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한달동안 80명이 복귀를 하지 않고 농성을 하고 언론제작을 거부했읍니다.
박석무 위원
그 언론제작 거부 이유가 지금 증인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마치 조선일보를 문닫으면 권력이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이 좋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신문을 내자라고 해서 마치 그 분들은 조선일보를 폐간하자라든가 문을 닫자라든가 쪽의 이야기이고 그렇게 이야기 하고 계시고 또 한편으로는 자유언론 수호를 했다 이렇게 지금 이야기 하시는데 제가 듣기에…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조선일보 사원들이 다 한 것입니다.
박석무 위원
다 했는데 그 분들만 나갔는데 나간 이유는 그 분들은 조선일보를 문을 닫기를 원해서 결국 할 수 없이 내부 사정상 그 분들을 해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결론이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박석무 위원
하여튼 문을 닫자고 해서 할 수 없이 전체 사원을 위해서라도 그 몇 분 34명을 내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제가 채용하고 제가 키우고 침식을 같이 했던 사원들을 부득이 사규에 의해서…
박석무 위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지금 오늘 이 순간에도 그 분들은 신문의 문을 닫자고 해서 해직시킨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박석무 위원
그렇다면 증인께서 권력이 좋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신문을 제작해야 된다 조선일보는 문을 닫아서는 안된다 라고 하셨는데 제가 이것은 정확하게 한번 말씀을 드려볼께요. 3월 15일 조선일보 창간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 신홍범씨와 외 1인 2명 74년 12월에 해직이 되었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박석무 위원
그래서 회사에서 약속하기를 최소한도 내년 3월 5일 즉 창간 기념일까지는 복직을 시켜 주겠다 했는데 이제 여기 기록에 보면 3일만에 소위 이 약속을 어기고 복직을 안 시켜주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창간기념일까지 기다리다가 안되어서 3월 6일부터 이제 뭐 농성을 했다 이런게 기록이 나와 있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래가지고 75년 3월 15일 오후 7시… 지금 좀 13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증인이 기억을 잘 회상하지 않으면 기억을 못하실 수도 있읍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아마 증인은 기억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오후 7시에서 8시사이 조선일보사 사옥 뒤에 있는 한성여관이라고 있읍니다. 혹시 증인 기억하시는지요? 한성여관 밀실에서 칠 팔명의 조선일보 기자들과 또 지금 저희들이 이름을 말하면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우리 나라의 저항시인이 있읍니다. 이 사람조차도 … 증인! 지금 그러 것 기억하시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잘 기억하고 있읍니다.
박석무 위원
아 기억하고 계십니까? 증인은 이 조선일보 문을 닫기를 경영주로 사주로서 그것을 좋아할 사람 없읍니다. 즉 그 때 이 7·8명 쫓겨나서 이 조선일보 사옥 뒤에 있는 한성여관관에서 앉아 잇는 조선일보출신 해직기자입니다. 이분들 7·8명에게 와가지고서 저쪽을 한번 가리킨 모양이에요. 거기서 저쪽을 가리키면서 신문사를 가리키는 겁니다. 저쪽은 어느 신문사이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말씀 안드리겠읍니다.
박석무 위원
조선일보사에서 저쪽은 어느 신문사이겠읍니까? 조선일보사 저쪽에 있는 신문사가 또 하나 있어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어느 쪽에 말씁입니까?
박석무 위원
건너편 쪽으로…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건너편 쪽에는 서울신문이 있었고 또 대한공론사도 있었고 또 동아일보도 있었읍니다.
박석무 위원
동아일보사를 가리키면서 아마 동아일보도 그 때 75년 언론인해직문제로 파동을 또 겪었읍니다. 동아파동 조선파동 그렇지 않습니까? “저 동아일보는 이미 항복했다. 이제 동아는 끝장이 났다. 학생들이 돌맹이로 저 집으로 던질 것이다. 조선일보가 이제는 제1지가 된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무슨 심정으로 저 쪽과 짜고 이렇게 들어오지 않고 그러느냐?”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서 권력쪽보다는 오히려 상대 언론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고했다 라는 이런 명확한 증언을 본인은 청취하고 있읍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기억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전연 기억이 없읍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동아일보 명예회장인 김상만 선생님께서 자리를 같이하고 있읍니다. 동아는 공존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박석무 위원
증인께서 기억이 없으시므로 기억 못하시면 제가 증인의 기억까지를 되살려 드릴 수는 없읍니다.
자 김상만 증인께 묻겠읍니다. 증인께서는 75년도 해직문제에 대해서 딴 동료의원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면서 뭐 공무실을 점거하고 있어가지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해직시켰다 무려 134명을 해직시킨 것으로 본위원을 알고 있읍니다. 134명이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134명이었었는데 거기서 13명은 복귀가 되어서 121명입니다.
박석무 위원
예. 지금까지도 121명 아직 복직안되고 있지요?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예. 안될 줄로 알고 있는데 그 후에 내가 실무에서 떠나있어서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확실히 기억을 못하겠읍니다.
박석무 위원
본위원은 어제 이래로 또 그 전부터 또 근래에 보도되고 잇는 자료들에 의해서 당시 뭐 박관용위원께서 질의를 하셨읍니다마는 거기에 답변하는데 좀 석연치 않아서 묻습니다. 지금 해직되어서 동아일보에서 나와있는 기자들의 이야기와 지금 증인께서 말씀하시는 이야기와는 너무도 배치되어서 어느 쪽이 옳은가 판단할 수가 없는데 다시 본위원이 질의를 하겠는데 지금도 아까 말씀하신 것이 옳은 답변이십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예. 그렇습니다.
박석무 위원
제 생각으로는 정말 어떤 동아일보에 대한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또 애착을 갖고있는 한 사람으로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그 분들의 자유언론을 수호하기 위해서 신문사를 정리한 것이지 아마 동아일보사를 망하게 하려고 점거한 것은 본위원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의 그 당시 주의 주장으로 볼 때... 그렇다면 여러가지 사회 내외의 어떤 또 사내의 여러가지 여건상 도저히 그 당시 신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분들을 해직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정황을 설명하셔서 정말 나가있는 그 분들에게는 미안하다 이렇게 해서 앞으로 어떤 그 분들의 해직사태를 풀고 이제 복직을 할 길이 있다면 복직을 하고 또 그분들의 그 동안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보상문제 같은 것도 한번 생각해보겠다 본위원은 증인께서 오늘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면 얼마나 이 나라 언론발전에 좋을까 싶었는데 그렇게 답변안해주신 것이 본위원은 좀 섭섭한 생각을 갖고 있읍니다.
다시 방우영증인께 묻겠읍니다. 방증인께서는 신문사 사주를 대표해서 당시 국보위 입법위원이 되셨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습니다.
박석무 위원
입법회의에서 언론기본법이 소위 의결로 통과된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알고 있읍니다.
박석무 위원
그 언론기본법이 어떤 내용인 것도 대강은 알고 계시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 당시 1980년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5개월동안 입법의원으로 참여하였읍니다. 저는 그당시 내부위원회의 소관이었기 때문에 언론기본법이 어디에서 누가 성안을 해가지고 상정되었는가는 전혀 모르고 있었읍니다.
박석무 위원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언론계라고 해가지고 세 사람이 나와있읍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예.
박석무 위원
지금 증인 또 이원경 이진의 이렇게 세 분이 나와있는데 당시 신문입니다... 본위원의 의심점은 물론 이것은 절대 자의는 아니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언기법은 바로 80년대의 언론의 암흑기를 맞는 데의 중요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언론계를 대표해서 들어가신 증인께서는 그 언론기본법이 통과하는 데 대해서 어때요 반대의 발언이라도 한번 해본 기억이 있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어느 날 본회의에 출석하러 나갔더니 언론기본법이 상정되었다고 그래가지고 검토도 없이 그냥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읍니다. 그때는 투표도 없고 가결도 없고 거의 요식행위로써 본회의에 나와가지고 만장일치로 일사천리통과되었읍니다.
박석무 위원
그것 뭐 그렇게 증인으로서는 불가항력사태에서 그냥 그렇게 통과되었다 그 말씀이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렇게 해석해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박석무 위원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언론기본법이라는 것이 독소조항의 대표적인 것이 행정권으로 즉 말하자면 문공부장관은 특별한 어떤 구체적인 조항이 몇 개는 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특별한 이유없이도 언론사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사법적 절차도 없이... 그러한 법을 증인은 언론계를 대표해서 들어간 입법의원으로서 그 상황이 아무리 어떠한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이렇게 할 수가 있느냐 하고 한번 항의라도 했어야 하는 것이 언론인으로서 지금쯤 떳떳한 일이 아니겠느냐 본위원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박석무 위원
그로 인해서 언론이 얼마나 통제된 것 잘 알고 계시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언론기본법에 의해서 발행인의 생명도 문공부장관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박석무 위원
그래서 수없이 언론이 통제받지 않았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래서 그후 저희들은 사설을 통해서 3·4차례 사설을 썼고 언론기본법의 잘못을 지적했고 또 시리즈를 통해서 수차에 걸쳐서 언론기본법은 고쳐져야 된다고 강조했고 또 야당측에서 발표하신 언론기본법에 대한 반대입장을 확대해석해서 보도한 바가 있읍니다.
박석무 위원
아무튼 증인은 그 과정에서 노력을 하셨는지 모르겠읍니다마는 그 사실만은 결과적으로 이렇게 명백하게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읍니다. 신문에 이렇게 사전까지 박혀서 이 사실은 언론사의 불행한 일이라고 본위원은 생각하는데 물론 증인도 그렇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난 언론청문회에 당시 신아일보발행인이던 장기봉사장께서 증인이 앉아 계시는 그 자리 어디쯤에 앉아가지고 본위원 질문에 답하면서 지금 여러 위원들이 또 그 문제를 거론하셨는데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다시한번 묻고 싶습니다.
7월에 유학성 중앙정보부장이 새로 임명되어 가지고 언론사 대표들을 불러서 만찬을 베푼 적이 있다는데 그런 기억이 나십니까 하니까 있고 말고요 신라호텔에서 있었읍니다. 그때 그 모임중에 사주 한 분이 언론정비문제를 거론했다는 데 기억나시는가요 그랬더니 박위원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나요 저는 참으로 그 장기봉증인은 여기 증언석에서 처음 얼굴을 보는 분이었읍니다. 그 분을 한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한통화한 적이 없고 다만 본위원이 듣기에 세간에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모 언론사주가 유학성 정보부장에게 언론정리를 촉구하는 말을 했는데 장기봉사장이 그 말을 한 것같다 한번 그 분이 나오면 알아 보겠다 그래서 제가 부인할 것으로 알고 지나가는 말로 물었읍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느냐고 기억한다고 그러면서 모 조간신문사장이 지방에서 모 주간지가 사고를 냈다고 그러면서 왜 언론사를 빨리 정비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그랬읍니다. 모 조간신문사 사장이라고 그랬읍니다. 그러면서 그 얘기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장소까지 신라호텔이라고 얘기하고 그래서 아마 그 증인도 이것이 TV중계된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에요. 그랬을 때 거기에서 거짓말하겠느냐 그랬는데 지금 증인의 말대로라면 장증인은 거짓말을 했네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박위원께 한가지 묻겠읍니다. 저는 박위원 때문에 두번 구설수에 올랐고 또 우리 200만 독자 국민들로부터 많은 규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셔야 되겠읍니다. 첫번째 박위원께서는 방우영이가 태평회에 관여한 일이 있느냐 이렇게 국정감사에서 질문을 하셔서 그것이 도하 신문에 대서특필된 일이 있읍니다. 저도 조그만 인격이 있고 또 조선일보사의 명예가 있읍니다. 또 200만부를 선택해 주신 수맥만 독자들이 계십니다. 그때에도 저는 속으로 섭섭했읍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 청문회를 통해서 언제인가는 밝혀지리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읍니다. 또 박위원께서 그런 질문을 하셨는데 아까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드렸읍니다. 그런데 박위원께서는 어떻게 신라 호텔에서 유학성이라는 분하고 만나가지고 방우영이가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을 어디에서 누구한테 들어셨읍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읍니까?
박석무 위원
제가 질문한 것이 아니고 다른 동료위원의 질문에 증인께서 마치 증인이 지목된 것처럼 얘기하면서 신라호텔까지 확인해 보았다 그런 얘기를 하셨기 때문에 제가 질문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방증인인가 아닌가 몰랐고 그래서 사실 장증인에게 그 조간신문이 두세 개인데 누구인가 묻고 싶었어도 특정인의 이름이 나옴으로 해서 피해가 갈 것 같아서 본인은 보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태평회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그 다음 날 KBS국정감사시에 방사장이 관계되었는지 확인해 본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그로 인한 오해에 대해서 본위원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린 바가 있었고 또 보도도 되었읍니다. 그 점에 대해서 지금도 오해하신다면 본위원이 다시한번 유감스러움을 표합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감사합니다.
박석무 위원
다만 본위원도 다른 여러가지 문제가 있어서 80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신라호텔에 같이 일하고 있는 여러 사람을 보내 보았읍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 보면 이것은 당시의 신문인데 바로 조선일보입니다. 이 7월 15일자 신문을 보면 중앙정보부장에 유학성씨라고 해 가지고 18일에 대장으로 승진과 예편과 동시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것으로 확인해 볼 때 새로 중앙정보부장에 임명이 되면 대체로 관례가 며칠후에는 언론사대표정도를 불러서 만찬 한번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딱 맞아떨어진다 말입니다. 그런데 증인은 10월 10일이라고 지금 명기한 날짜를 기억하고 계시는데 본위원이 신라호텔에 다른 일로 신라호텔 몇 호실에서 무슨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신라호텔 컴퓨터도 있고 그래서 알아보았더니 불행히도 3년이전의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방 호수에 누가 들어오고 파티를 누가 주최한 것에 대해서 3년이전의 것은 없고 3년이후의 것은 있다 그런데 사람이름을 보면 컴퓨터에 나옵니다.
제가 분명히 증거를 대기 위해서 말씀드리면 이진희 문화방송사장이 67일 사이에 몇 십 명의 해직을 내면서 그 신라호텔에 어떤 방에서 작업을 했다는 그런 정보가 있었기에 알아보려고 온갖 애를 썼는데 3년이후것은 있어도 3년이전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위원은 그렇게 알아보았읍니다. 그런데 증인께서는 어떻게 알아보아가지고 10월 10일에 그 만찬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는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저는 1965넌부터 일기를 쓰고 있읍니다. 오늘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고 있읍니다. 저는 일기를 확인해 보았읍니다. 그래서 혹시 박위원께서 꼭 필요하시다면 그 일기를 제가 증거로 제시하겠읍니다.
박석무 위원
신라호텔에 확인해 보았는가 하고 오해했는데 그렇게 일기에 나와있다면 다행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정황상 7월중순에 임명되었고 그래서 7월에 있을 법하다 라고 했는데 또 장증인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그래서 조간신문하면 두 분아닙니까 또 입법위원이셨고 그렇다면 아무래도 그 방증인일 가능성도 있다는 추측은 가능했어요. 그런데 좀 확인을 해 보려고 했는데 오늘 확인이 안 되네요.
그 다음에 증인께서 제가 근래에 모 언론연구소에서 간행한 논문집을 보았더니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개의 신문을 비교한 논문이 나와 있는데 80년대 언론암흑기에 보도지침에 응하는 율입니다. 보도지침을 내리면 응하는 율을 이렇게 두개 세개 네개 신문을 비교를 해 놓았는데 동아일보는 한 68% 그리고 조선일보는 79% 이런 것이 나와있는데 물론 이것은 학자의 한 논문이기 때문에 확인하지는 못 합니다마는 그런 것과 연유해서 제가 몇가지 찾아보았더니 80년대 가장 우리를 암흑기로 만든 것은 5·17조치 5·18광주민주화운동 그러면서 이제 국보위가 탄생되고 또 전 장군의 대통령 만들기에 신문작업들 여론화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아픈 것은 삼청교육대문제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도 조선일보자에서는 지금이 삼청교육대에 대해서는 정말 온 국민이 분노하고 그런데 다른 신문에 비해서 이 조선일보는 유독 이렇게... 이것이 조선일보 지면입니다. 뭐 여기 내용을 조금 간추려보면 큰 글자만 보더라도 [머리깍고 금연 금주 검은 과거를 씻는다. 땀을 배우는 인간교육장 불량배 1,000여명 군부대에서 4주간 정신순화작업 17세 고교생부터 59세까지 이웃사람 외치며 봉체조 막대기체조]라 그말입니다. [새마을성공사례 듣자 연병장은 울음바다] 이러면서 이 일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5공 동안의 전두환 독재 치하에서도 가장 수치스럽고 광주사건 다음에 끼입니다. 광주 의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까 이런 엄청난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미화해서 보도할 수가 있느냐 당시 조선일보사를 대표했던 방증인으로서 한말씀 하실 말씀이 없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청문회 자리에 나와서 정중하게 답변하려고 이자리에 섰읍니다. 의견을 꼭 말씀드려야 하겠읍니까?
박석무 위원
의견을 말씀 안해도 좋습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제가 말씀을 하겠읍니다. 언론이라는 것이 권력도 무섭지만 그보다도 국민의 심판 국민의 비판 국민의 감시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저희 언론은 더 잘 알고 있읍니다. 지금 박위원께서는 나무 가지 하나만 보고 말씀하셨읍니다. 숲도 봐주시기를 저는 부탁드립니다. 물론 저희들이 잘못된 보도를 많이 했고 언론본연의 사명을 다했느냐 변명도 아니고 면책을 피하겠다는 말씀은 안드리겠읍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그 몇 배 몇 십 배 사설 논설 기자 칼럼 이자리에 조세형위원도 계시고 한데 아침논단도 써주셨읍니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200만부라는 독자를 확보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박석무 위원
좋습니다. 물론 이것이 조선일보만의 일이 아닙니다. 어느 신문도 다 그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다만 그때의 기사를 보면 좀 덜한 신문이 분명히 있읍니다. 그래도 미화된 부분이 조선일보가 더 심해서 제가 거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역사에서 가장 아픔 중의 하나가 아마 두고두고 광주의거일 것입니다. 이것이 80년 5월 25일자입니다. 광주의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에 더구나 이 신문은 기명까지 붙인 기자입니다. 광주로 간 모기자가 보도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중에 다 좋습니다. 어느 신문도 대체로 이렇게 보도를 하고 있는데 저는 더구나 거기에 이 문제하고도 더 유관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보면 [총을 든 난동자]들이라는 구절이 있읍니다. 큰 글씨는 다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돼 있고 당시 우리가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 또 지금 광주에 살고 있고 전라남도에 사는 사람들이 총을 든 난동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중에 며칠 지나면 각 신문마다 광주폭거라고 다 합니다마는 25일자에 총을 든 난동자들이라고 하는 또 조선일보가 상당히 앞장선 것이라고 본위원은 파악이 됩니다. 그리고 85년인가 86년인가 월간조선을 통해서 금난로의 10일 이것이 또 온 광주 전라남도를 분노케 해가지고 당시에 귀지를 그쪽 지역에서는 불매운동을 벌이고 야단을 쳤읍니다. 그런 것 기억하시지요?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박위원님! 그 말씀에 대해서는 제가 분명히 대답하겠읍니다. 85년 월간조선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었읍니다. 어느 잡지도 못 다룰 때 조선일보는 다루었다는 것을 평가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박석무 위원
그때 다루었다는 것은 그때 비슷하게 신동아에도 나왔읍니다. 신동아의 기자는 그때 들어가서 맞기도 하고 뭐 그랬읍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이 왜곡을 했었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박위원! 박위원!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그 당시 그 정도 보도했다는 것만해도 조선일보의 용기라고 저는 생각하고...
위원장 정대철
지금 신문 중이고 답변 중입니다마는 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후면 자정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자정이 지난 뒤에 곧 이어 차수를 바꾸어서 제 16차 당위원회를 개의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지금 출석하고 계신 네 분 증인께서는 오늘 자정이 지난 뒤에 개의되는 당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서 증인으로 증언해 주시겠는가에 대해서 각각 묻고자 합니다. 앞으로 저희들 지금 예정대로 하면 이철위원 등 두세 분 남아서 한 30여분간의 계획이 남아 있읍니다. 이에 대해서 강제성은 없읍니다. 그러나 나머지 네 분 증인께 묻겠읍니다. 먼저 김상만 증인께 묻겠읍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30분 내기 40분 정도 남아계실 수 있겠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예. 남아있도록 노력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고맙습니다. 다음 방우영 증인께서 3·40분 남아 계실 수 있겠읍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차수문제입니까? 위원장님!
위원장 정대철
예. 차수문제입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예. 저도 김명예회장과 같이 동의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예. 감사합니다. 그 다음 이종기증인께 묻겠읍니다. 참석하여 주시겠읍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같은 의견입니다.
위원장 정대철
예. 감사합니다. 다음은 장강재 증인께도 묻겠읍니다. 참석하여 주시겠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예.
위원장 정대철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동욱 참고인께도 묻겠읍니다. 참고인께서도 자정 이후 당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주시겠읍니까?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예.
위원장 정대철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13일 오늘 회의를 마치고 잠시 자정이 지난 뒤에 16차 당위원회를 개의하도록 하겠읍니다. 산회를 선포합니다.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며 제16대 문교공보위원회를 개의하겠읍니다.
그러면 의사 일정 제1항 언론문제진상규명에 관한 청문회를 계속해서 상정하겠읍니다.
오늘은 먼저 어제 회의에 이어서 언론인해직에 관한 사항을 주로 하여 언론인해직에 관한 사항을 주로 하여 김상만 방우영 이종기 장강재 이상 네 분 증인에 대한 신문을 계속하도록 하겠읍니다.
한 가지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네 분 증인의 선서를 어제 당위원회에서 행한 바 있기 때문에 본청문회가 계속되는 동안 유효하다는 것을 상기하여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면 네 분 증인에 대한 신문을 계속하겠읍니다. 평민당에 주어진 시간이 조금 남았기 때문에 박석무위원께서 마무리 하여 주시고 앞으로 신문하여 주실 위원은 이철위원 20분 그다음에 조세형 손주환 백남치위원이 간단하게 신문해 주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읍니다.
그러면 박석무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박석무 위원
마지막으로 방우영증인께 한 말씀 드리고 말을 제가 마무리 하겠읍니다.
지금 이제 오전이 되겠읍니다마는 어제 오전에 나온 증인들을 통해서 제가 수집한 기자협회보라는 것이 있읍니다. 이 기자협회보는 바로 어제 오전의 증인의 증언에서는 기자들이 보는 신문이 신문 중의 신문이다 라는 이렇게 거기에 증인에 관한 또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것이 좀 과장일 수 있읍니다. 이것도 사실 시간이 있다면 내가 좀 여쭈어 보겠읍니다마는 그런 것들이 지적받고 있다는 것을 증인이 기억해 주시면 좋겠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각 신문 여기 나와계신 네 분 이외에도 여기 있읍니다. 네 증인들의 움직이고 있는 분야외에 각 신문사의 사시를 한번 모아 봤읍니다.
동아일보 사시를 보면 이것은 창간때부너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마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고 있고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데 과거에는 저는 잘 모르겠읍니다마는 최소한 5공화국 동안에만은 이 사시를 대단히 많이 준수하지 못했다라고 본위원은 생각을 합니다.
정말 신문이 거듭나기 위해서도 좀 이 사시를 다시한번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본위원의 견해입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일보사의 사시도 보면 “정의수호 문화건설 산업발전 부편부당" 얼마나 좋은 말씀들입니까?
과연 증인들께서 이런 자기 사의 사시를 고수해 오고 있는가 한번쯤 반성해야 된다는 생각이 됩니다.
또 중앙일보 사시가 좀 다른 사에 비해서 깁니다. “사회정의에 입각한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정의에 입각해서 신속하게 보도한다”고 그랬읍니다. “당파를 초월하고 정론을 활기하므로서 모든 사람이 밝은 내일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무한다.” 과연 5공화국 때 그랬는가 한번 반성해보아야 하겠읍니다. “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를 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 대도를 구축한다.” 과연 자유언론의 대도를 구축했는가?
한국일보사시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 춘추필법… 공자님이 춘추를 지으셨읍니다. 시시비비 옳은 것은 옳다고 전두환이 나쁘다면 나쁘다고 해야되고 전두환이가 잘 한다면 잘 한다고 해야 하는데 전두환이 나쁘다는 기사가 한국일보에 나온 기억이 없읍니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 5공화국 동안의 언론은 참 죽은 시체였다 오히려 국민을 오도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성 모욕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없다고 검찰 발표를 보도하고 광주의 그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삼청교육대로 그 많은 사람이 끌려가서 고통을 받았는데도 오히려 긍정적인 일로만 보도했던 그 부끄러움!
참으로 국민앞에 사죄하고 역사 앞에 심판받는 그런 숙연한 자세로 새롭게 언론이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이 본위원의 견해입니다. 특정 신문을 매도하고 그러자는 뜻도 아닙니다. 사실 제가 증거는 신문사마다 다 가지고 왔읍니다.
동아일보 절대로 그 당시에 보도 잘한 것 없읍니다. 다만 칭찬을 드린다면 광주항쟁동안에 5일 동안 사설 안 낸 것 저는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 몇 가지가 있읍니다. 한국일보 중앙일보 삼청교육대 문제에 대해서 광주의거문제에 대해서 표도로 매도하고 정부에서 발표한 대로 계엄사에서 발표한 대로만 해서 광주의 그 많은 사람들의 울분과 분노를 쌓아주게 했던 것 역사를 암흑으로 몰았던 것 함께 우리 반성하면서 새 역사를 이룩해야 되고 민주주의 뿌리를 내려야 되겠다는 것이 본위원의 견해입니다.
본위원의 질문중에 과도한 얘기가 있었고 실수가 있었다면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을 마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다음은 이철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백남치 조세형 손주환 위원은 이철위원 20분후에 5분 내기 10분씩 드리도록 하겠읍니다.
이철 위원
여기 언론학살 현장에서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많은 사직서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면서 저는 참 많은 울분과 슬픔을 가지면서 읽고 또 읽었읍니다.
이 유언내용이라고 할 수 았는 사직서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때 대강 이렇습니다. 이 눈물과 함께 떨리는 손으로 타인이 불러주는 대로 쓴 흔적이 역력한 것들이 우선 이번 언론계자율정화결의에 따라서 사직합니다. 하는 이런 내용들이 상당히 있읍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득이 1980년 7월 30일부로 사직원를 제출합니다.
이런 내용도 있어요. 또 사직을 하면서 “조선일보 가족의 무사와 건승을 입니다.”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함께 생활을 해왔던 같은 사의 가족들의 생명을 걱정하는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읍니다.
어떤 기자는 “월간조선 6월호 특집좌담에서 전후세대가 갈망하는 통일전망이라는 기사게제의 책임을 지고 해직서를 냅니다.” 하는 이런 내용도 있어요.
5.17광주학살의 현장처럼 이 암울했던 언론이 학살 당시 사주 여러분께서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 한분한분 간단하게 그 당시의 소감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장강재 증인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을 위원님과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철 위원
이종기 증인 말씀해 주시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조금전에 장회장께서 말씀하신 것하고 같이 한솥의 밥을 먹던 사람을 떠나보낼 때는 그것이 즐거운 것이 절대로 압니다.
신문사라고 하는 데는 특별히 다른 공장하고 돌려가지고 매일 아침에 나왔다가 저녁에 같이 들어가는 오히려 가족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직원들의 인간관계입니다.
저희가 과거에 해직의 아픔을 거울삼아가지고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이철 위원
방우영 증인...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자기 손으로 키우고 또 침식을 같이 하고 있던 사랑하는 자원들을 어떤 강요에 의했든간에 사에서 물러나게 했던 데 대한 가슴 아픔을 금치 못하겠읍니다. 남은 동료들 그리고 제가 그 뜻을 되새기고 또 되살려서 앞으로 언론의 정도를 걷는 데 힘을 다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철 위원
김상만 증인도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읍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예. 같은 뜻인데 해직을 시킬 때 가슴 아팠던 것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읍니다.
이철 위원
좋습니다.
제가 방금 나누어 드린 언론계자체정화계획 이것 갖고 계시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갖고 있읍니다.
이철 위원
그리고 언론인 자체정화 결과보고 문화공보부라고 쓰여 있는 이것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시면 언론계 자체정화계획에 숙정방법 세번째 페이지입니다. 제1단계 7월 25일부터 7월 30일까지 입니다. 이것은 그 사이에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의 긴급총회를 소집해서 자율적인 숙정을 결의한다.” 이렇게 되어 있읍니다.
2단계는 “8월 1일부터 8월 10일까지 각사 발행인 책임하에 언론자체정화위를 설치해서 자체연정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 지금 각사의 해직기자들의 사직서를 다 가지고 있읍니다마는 각사 공히 이미 강요되기 이전에 제1단계에서 7월 29일 7월 30일 사이에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강재 증인 맞습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맞습니다.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이철 위원
방우영증인 맞습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부분적으로 약간 좀 틀린 점도 있지만 대개 긍정합니다.
이철 위원
김상만 증인 맞습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대체로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철 위원
다시 말씀드리면 그 당시에 4대 일간지가 한결같이 강요하기 이전에 강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스스로 자기들의 가족을 내몰았다는 것을 저는 증명하고 있읍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7월 29일 신문방송협회가 긴급 소집이 되어 가지고 결의를 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마는 7월 30일 거기에 의해가지고 회사에서 사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떤 결의가 나오기 전에 사표를 받은 것이 아니고 결의가 되고 난 뒤에 사표를 제출하게 된 것입니다.
이철 위원
적어도 3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세번째 마지막 단계에 가면 물론 발행인과 사주가 엄청난 참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는 경고를 해놓고 있는 문서입니다.
그 3단계 8월 30일 이전에 마지막 시안을 8월 30일까지입니다. 8월 30일 이전에 이미 제1단계에서 스스로 정말 자율적으로 짜른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증명을 합니다.
물론 그 당시에 어떤 계엄하였고 엄청난 위협이 있을 것으로 짐작을 합니다. 그러나 그 가족들을 자르는 그런 엄청난 일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해치웠다…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자율적으로 하지는 않았읍니다. 자율을 가장한 타율적으로 했지요.
이철 위원
자율을 가장한 타율 그런데 그것을 아주 빠른 시일내에 재빨리 단행을 했읍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실지 날짜는 8월 1일부터 10일이지만 그것이 끝난 것은 아마 8월 20일 이후일 것입니다.
이철 위원
완전히 끝난 것은 8월 20일경이 다… 오늘 이 증인들께서 이렇게 참석하신 것을 우리의 아픈 언론사 굴절의 언론사 언론의 기구한 운명을 우리가 국민앞에 한번 조명해 보자고 하는 뜻으로 저는 해석을 합니다. 그것은 언론 경영인들의 이 행태와 같은 궤적을 보이고 있는 언론사를 우리가 한 눈에 보고 있읍니다.
일제 말기의 언론은 일제의 강점체제에 무릎을 꿇었고 무릎을 꿇었지만 결국 대동아전쟁때 결국은 문을 닫고 말았읍니다. 1961년도 박정희군사 ⸢쿠데타⸥이후에 1964년도에 윤리위원회파동을 아실 것입니다.
이 당시에 언론은 저항을 했읍니다. 그래서 일정하나마 자유언론의 위치를 확보를 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의 소중한 경험으로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등장하자 언론은 또다시 권력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즉 동아 조선사태입니다. 이후에 많은 언론인들은 동아 조선사태 이후에 소위 우리나라 언론이 제도언론으로서 정착했다 이렇게 규정합니다. 그후에 1979년도 1980년도 전두환일당이 두 번의 군사변난을 통해서 실권을 잡았을 때는 가족까지 내몰고 통폐합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길들여진 언론으로 전락하고 말았읍니다.
아까 동아일보 사태에 대해서 김상만증인께서 증언해 주셨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김상만 증인을 대신해서 이동욱참고인께서 답변해 주셔도 좋습니다. 아까 김상만 증인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그 당시 동아일보사에 농성을 하고 있던 소위 자유언론보호를 위한 투쟁은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한 동아일보의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한 그리고 정의로운 투쟁이었다 하는 시각에서 말씀드립니다.
이미 1974년도 광고탄압사태가 발생하자 동아일보는 문제기사를 줄이기 시작했읍니다.
그래서 회사 간부들이 문제기사들을 약화시키거나 외면하려하는 사례들이 더욱 많아졌읍니다.
예를 들면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에서 그것을 보도함에 있어서 고문이라고 하는 말대신에 가혹행위라는 표현을 쓰라고 회사 간부가 지시를 했읍니다. 또 인혁당이라는 말도 제목에는 쓰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억을 하고 있읍니다. 동아방송에도 인기 프로 정계야화의 재방송을 회사측에서 하지 못하게 했고 6월하순에는 동아일보 정기주주총회가 개최됐는데 이 정기주주총회가 굉장한 큰 관심사였읍니다.
이미 권력에서 동아일보를 잠재우려고 하고 있었읍니다. 동아일보 사주가 경영주가 과연 자유언론 투쟁을 하는 이 정의로운 언론이 편에 서느냐 아니면 권력에 붙느냐 이것이 판가름 나는 그런 중요한 정기주주총회였읍니다.
이때 이 주주총회 결과로 참고인께서 주필로 취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사복무규정을 강화시키고 인쇄물 배포를 금지하고 집회를 금지하고 자유언론 실천을 정면으로 억압하는 조치를 잇따라 냈다 이렇게 기억을 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회사는 자유언론수호투쟁을 하는 기자들을 소위 경영난으로 인한 기구축소조치로 심의실과 편집국 기획부 과학부 출판국의 출판부를 없애고 소속사원 18명을 전원 해임한다는 이런 인사발령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들 그리고 많은 여기 찬동하는 자유언론수호투쟁에 찬동하는 많은 기자들이 농성에 들어갔던 결과입니다. 아까 김상만 증인께서 증언하신 내용의 전반부에 해당하는데 이 사실이 맞는지 확인을 좀 해 주십시오.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이제 본위원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저한테도 그 정도의 시간을 주십시오.
그때 해직당한 그분들은 민주언론인이 틀림없읍니다. 그러나 남아서 그냥 제작하고 있던 그 사람들도 민주언론임에 틀임없읍니다. 그런데 언론이 존재하려면 언론매체 언론기관이 존재해야 언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언론매체가 없는데는 언론이도 없고 언론의 기능은 없읍니다. 그러니까 무슨 희생을 해서라도 언론매체는 그냥 살아 있어야 됩니다. 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론매체가 죽었는데 어디 언론인이 있고 언론기관이 있읍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그때 동아일보가 어떻게 됐느냐 이제 여러가지로 그대는 제가 잠깐 동아일보를 비웠을 때이니까 사정을 잘 모르겠읍니다마는 약간의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2보전진을 위해서 일보후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동아일보는 벌써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만큼이라도 했는데도 불구하고 광고탄압을 했읍니다. 광고탄압을 해서 동아일보 다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 이제 죽게 된 마당에서 이동욱이 주필 제가 들어왔읍니다. 저를 관선주필이라고 그랬읍니다. 물론 관선주필인지 주필이 아닌지는 시방 14년이 지났으니까 결론이 났을 줄 압니다. 안나왔다면 앞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관선주필 퇴진해라 해가지고 편집국을 점거해서 신문제작을 못하게 하고 또 고장을 점거해서 신문찍지 못하게 하고 또 주조정실을 점거해 가지고 방송송출을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신문찍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언론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런 문제가 있읍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할 때 민주주의입니다. 폭력을 긍정하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아니 신문공장을 점거해 가지고 신문찍지 못하게 하고 방송주조정실을 점령해 가지고 방송을 못하게 하고 이런 폭력을 사용하는 이 사람들을 민주주의의 민주언론이라고 과연 할 수 잇느냐 민주주의언론이라는 정의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결국은 동아일보는 살았기 때문에 동아가 견디어 냈기 때문에 그래도 말하자면 YH사건때있어서 저런 투쟁도 했읍니다.
여러가지 한 것은 일일이 열거하려면 있읍니다. 그런데 제가 한 가지 말씀을 이어서 더 여쭈어야 되겠읍니다.
이제 여러분들 여러가지 제도언론에 대해서 매도를 하셨읍니다. 비난을 하셨읍니다. 물론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거듭 나야 됩니다. 다 찬성합니다. 그러나 지난 6.29선언이 나왔읍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승리를 하는 데 있어서는 젊은 학생들이라는지 기타 젊은이들이 여러가지 피나는 투쟁을 했읍니다. 그래서 승리를 우리가 거둔 것으로 믿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제 매도당하는 언론이 거미줄보다도 더 가는 언론의 자유속에서 이걸 활용해 가지고 캠페인을 제대로 했읍니다. 그 캠페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박종철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한열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 나름대로 투쟁을 했고 제도언론이라고 실컷 매도 당하고 있지마는 이 사람들이 그래도 거미줄만 못한 자유속에서도 활용을 해서 그만큼 싸웠읍니다. 그래서 6.29선언이 나왔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가 덮어 놓고 화끈 싸우고 화끈 문을 닫으려면 그것 쉽습니다.
그러나 정치도 그렇지만 언론도 현실입니다. 그렇게 화끈 싸우고 화끈 문닫고 이러는데 어디 언론이 있고 어디 언론의 힘이 있읍니까? 그러니까 이런 점도 평가를 해 주셔야 되겠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광고탄압 할 당시 일은 저 역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이철 위원
참고인 말씀대로 굴욕과 굴종만을 강조하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참고인의 표현을 비리면 전진과 후퇴를 거듭한 추종과 오역으로 점철된 언론사였다 이렇게 규정하면 맞습니까?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오욕도 있읍니다. 그러나 영광도 있는데 오욕만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이철 위원
그러니까 2보 전진한 것은 광고회복이고 1보 후퇴한 것은 가족의 축출이었다 이런 말씀이지요?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이제 그 말씀 한 번 더해 주시지요.
이철 위원
그러니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2보 전진이라는 것은 광고를 회복하고 동아일보의 생존을 지탱하는 것 이것이 2보 전진이겠지요. 1보 후퇴는 가족을 축출하는 것…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축출은… 여보세요. 신문 찍어야 합니다. 그러면 공장검거한 사람을 끌어내야 찍지 끌어내지 않고 어떻게 찍습니까? 또 끌어 내는데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중앙정보부가 보내 주고 무슨 정부가 보내 주고 이런 사람들이 어런 불한당을 갖다가 한 것이 아니라 우리 판매국사원 또 우리 차량과사원 그리고 우리 경비실사원 정당한 사람들을 끌고 했읍니다.
그런데 이것을 갖다가 정보부가 파견한 불한당을 갖다가 끌어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이철 위원
그러니까 그당시 농성하던 기자들 축출하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들어 갔겠지요?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들어갔는데 그중에 그런 사람 없었읍니다.
이철 위원
그때 농성하던 기자들은 각목 햄머 산소용접기 소방호스를 그사람들이 들고 왔다고 얘기하는데 사실입니까?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문을 닫았으니까 손으로 열어서 뚫고 들어갈 수가 없고 또하나 각목은 위협입니다. 위협이지 하나도 다치지 않았읍니다. 순순히 다 나왔읍니다. 순순히 나와서 하나도 충돌이고 실랑이도 없었읍니다.
이철 위원
그 사람들 신원은 알고 계시는 모양이지요?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갔던 사람들 우리 사원들 왜 모릅니까?
이철 위원
그러니까 농성을 해서 신문제작을 거부하던 사람들이나 방해하던 사람들이나 위협용이라고 각목을 들고 갔던 사람들 둘 중에 어느쪽도 처벌 받을 사람이 있읍니까?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각목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사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처벌은 왜 처벌을 합니까? 그사람 우리 사에서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들을 끌어내야지 우리 신문을 찍을 수 있다…...
이철 위원
이동욱 참고인이나 방우영 증인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동아와 조선일보가 민족지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는데 그렇죠? 민족지 논쟁이 중간에 중단이 되었지요? 1985년도 그것을 기억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좀 더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철 위원
1985년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 논쟁을 벌여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누가 더 민족지냐 그런 경쟁입니까?
이철 위원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제 기억에는 그것이 하루 이틀 그런 논쟁이 있은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김상만 명예회장 나와 계시지만 이거 우리 언론끼리 뭐 민족지가 잘났고 뭐고 지금 그럴 때가 아니고 언론이 정도를 걸어야 될 때다. 그래서 곧 전화연락 해가지고 그다음 날로 게재 중단한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철 위원
결국은 반일 친일 논쟁을 하면 둘다 결과적으로 좋지않다 하는 그런 이유 때문에 그것(민족지 경쟁)이 중단 되었던 것으로 봅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아니 친일이라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철 위원
양사가 우리 민족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권력에 굴종했던 그 역사가 우리 언론사의 하나의 치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시면 곤란합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조선 동아가 일제 때 그래 왜놈한테 굴종하고 앞잡이 노릇했다는 것입니까? 말씀 삼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역사를 뒤집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선일보하고 동아일보가 왜놈한테 붙어가지고 친일파를 했다는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여기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조선이나 동아나 68년 역사를 가지고 있고 저희들의 선인, 선배들이 그 혹독한 조선총독부 밑에서 피흘리고 고문당하고 옥사를 하면서까지 그래도 겨레를 위하고 민족의 존립을 위해서 끝까지 목숨으로 싸우다가 조선 동아는 끝내 폐간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그러한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십니까? 역사는 모든 것이 뒤집어져야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철 위원
그러한 투쟁사 일제하에서의 우리 언론의 투쟁사와 그 언론의 굴종사는 서로 교차되고 있습니다. 항상 투쟁만 해왔던 것이 아니라 항상 굴종만 해왔던 것은 아닙니다 .
여기에 그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시간 관계상 제가 인용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이위원님! 한번 묻겠습니다.
오늘 청문회는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 언론이 자유스럽게 국회의원 여러분들께서 보장해 주시겠다길래 저희들도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부터 민주언론을 위해서 거듭 태어나겠다 그래서 저희들은 오늘 기꺼이 동참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의제와 아무 관계없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과거 친일신문이었다 그런 말씀을 삼가해 주시기를…
이철 위원
우리의 아픈 역사를 비추어 봐야 앞으로 우리가 거듭 태어나고…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아픈 역사는 별도 표현해 주십시오.
지금 국민이 시청하고 계시고 또 우리 조선일보 200만독자가 이 자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조선일보가 과거 일제의 앞잡이를 했다고 모독을 하고 매도를 하시고 비난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철 위원
그것은 아마 양사의 민족지논쟁에서 이미 나타나 있고 많은 기록에 우리 빛나는 언론의 투쟁사와 언론의 비참한 굴종사를 같이 교차해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빛내지는 못할 망정 매도는 해주지 말아 주십시오. 선인들이 걸어온 길을 매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가 과거 독립을 위해서 우리 선인들이 무엇때문에 피흘리고 지금 선열들을 갖다가 우라기 민족의례 전에 추모를 해야 됩니?
이철 위원
그 사실을 부인하시면 여러가지 앞으로 논쟁이 계속될 것입니다.
위원장 정대철
방증인! 위원님께서 물으신 것에 대해서만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철 위원
동아일보와 중앙이 그 후에 76년부터 용인자연농원등을 보도하면서 여러 가지 논쟁을 벌였지요? 지상논쟁… 그런 것은 사실이지요?
이종기 증인! 맞습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어느 신문하고 말입니까?
이철 위원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두 신문이 상당한 지상언쟁을 벌였던 공격과 반격을 거듭하는 그런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지요?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예. 그런 사실이 있읍니다.
이철 위원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삼성의 입장을 대변해서 소위 자신의 독점적 이익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비쳤는데 그 사실중 일부는 인정을 하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저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부분은 잘못했다고 솔직히 시인을 할 것이고 또 저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주장을 해야 될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일이 오래된 일이고 앞으로 그런 문제 가지고 각 신문사끼리 서로 악의의 경쟁을 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사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철 위원
예. 좋습니다. 한국일보 장강재증인께 묻겠읍니다.
지금현재 사옥이 어떤 언론사라는 특혜때문에 도시계획의 가운데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철 위원
전혀 사실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의혹을 갖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는 들으셨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그게 아마 몇차 보도가 되었지만 미대사관쪽이 도시계획에 들어있죠.
이철 위원
장강재 증인과 방우영 증인께 묻겠습니다.
아까 경영과 편집의 독립을 주장을 하셨는데 오늘의 방청석에는 보시다시피 한국 언론계의 기라성같은 중진들이 모두 방청을 하고 있읍니다. 이 증인 네 분께서 출석하시는 것을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은 바로 편집의 독립이 아직은 미진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하는데 장강재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편집권은 독립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철 위원
돼야 되는데 아직까지는 미진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우수한 중량급 언론인들이 총출동 돼 있는 것 아닙니까? 경영이라고 할 때 경업적 이익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측면도 있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다른 측면도 있읍니다.
이철 위원
어떤 측면일까요?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공공성같은 거죠.
이철 위원
공공성인데 경영주는 주로 뭘 생각합니까? 편집방향은 생각 안하시죠? 편집방향도 규정을 하십니까?
제가 답변을 하겠읍니다. 주주로서 어떤 배당을 주로 목적으로 하실텐데 그렇죠? 신문사 경영이 타업종…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소유하고 경영이… 소유주는 말하자면 배당을 바라겠죠.
이철 위원
아무튼 제가 이제 결론만 내리겠읍니다.
장부의 이득 다시말하면 금전상의 이득뿐 아니라 어떤 사회적 특혜나 특권이 있다고 느끼시죠? 언론사를 경영함으로써…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성역이 어디 있겠읍니까?
이철 위원
성역이라고 일반국민들이 생각하는데 언론사를 경영함으로써 어던 상대적 특혜를 누려왔다고 생각하시죠? 좋습니다.
위원장 정대철
이위원! 빨리 좀…
이철 위원
예. 결론을 내겠습니다.
아까 딴 동료위원들이 여러 사의 성장사 그리고 언론사를 경영함으로써 얻는 특혜 언론이들의 어떤 특혜 이런 것들이 앞으로 시정돼야 되지않느냐 하고 지적을 했읍니다.
우선 여러가지 공정거래법을 위반하고 잇는 사항들 그것은 각사의 공통점입니다만 또 잡지업계에 대한 어떤 횡포을 자행한다고 항의를 받고 있는 사실 인쇄업 영세업종인 사업 인쇄에 대한 침투를 함으로써 특권을 남용을 하고 있다하는 사실 이런 것들 다 지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몇 마디만 덧붙이겠읍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읍니다. 아까 방우영 증인께서는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신 것 같은데 지난 시대의 우리 언론은 어떤 권력이든간에 권력이 기승을 부릴 때는 으례이 권력 앞에 꼬리를 흔들고
권력이 힘을 잃고 쓰러지면 그 시체를 뜯어 먹는 그런 하이예나 같은 속성을 지녔다 하고 언론은 비판을 해 왔읍니다. 지난 유신독재와 제5공화국의 폭압통치 아래서 많은 국민과 또 많은 언론인들이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지 위해서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을 때 언론 스스로는 자신의 권리를 권력에 헌납하면서 때때로 가족을 내몰기도 해왔던 그런 측면도 있읍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양심적 언론이 또 전국민들을 외면하면서 언론학살의 어떤 방관자 때때로는 방조자의 역할을 했던 흔적도 있읍니다.
그래서 언론은 여러가지 특혜와 권력의 품속에 안주하는 그런 특권을 부여받았다 하고 국민들은 주장을 합니다. 그 의미가 바로 오는 이 청문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가 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 문제를 다같이 공범이 된 입장에서 다같이 방관자된 입장에서 같이 반성을 하고 새로 거듭태어나 민주언론을 창달하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저는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위원장 정대철
앞으로 세 위원이 남으셨읍니다. 간단하게 해주시고 제가 이위원과 증인들과의 신문과정을 통해서 일제시대의 언론 75년 상황에서의 언론 제5공화국의 언론상황을 서로 신문과 답변을 하면서 마치 우리가 우유 반 컵을 놓고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 어떻게 볼 수 있느냐… 반 컵이나마도 괜찮지 않느냐 또 꽉차야 된다는 입장에서는 이것 모자라지 않느냐 이런 언쟁과 같이 느껴지며 마치 일제시대에 국내파임시정부국외파의 논쟁과 같은 어떤 것을 상기케 돼서 상당히 착잡한 심정입니다.
다음은 백남치 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백남치 위원
통일민주당의 백남치 위원입니다. 사실 13대 국회 처음 들어온 초선위원으로서 청문회에 처음 참가하면서 좀 느끼는 바가 많았읍니다.
특히 오늘 이자리는 우리나라 언론사에 정치사에 생생한 증인들이 많이 계십니다. 또한 우리 4천만 민국의 입과 눈과 귀를 대변한 언론사의 실력자들이 게시는가 하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미래의 언론을 짊어질 앞에 앉으신 증인들의 식구라면 식구요 후배라면 후배인 젊은 언론인들이 4천만 국민과 함께 이자리를 지켜보고 있읍니다. 지금 제 귀에는 새로운 언론사로 부디 거듭태어나라고 하는 국민들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구체적인 여러가지 질문과 중복되는 질문이 많기 때문에 몇 가지 질문을 첨가해서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오른 왜 여기 나오셨다고 생각하시는지 그 이유를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아일보의 김상만 회장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언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많은데 어떻게 해야 언론다운 언론을 해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의미로 이런 청문회를 연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백남치 위원
좋습니다. 여기 증인으로 나오신 분들은 5공화국 절대권력 시대에서도 신문의 행간으로 말하고 신문의 이면으로 표현해서 많은 식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암울했던 시대속에서도 한 알의 밀알을 뿌리고자 노력했으며 그런가 하면 절대권력에 순치되어 정부의 일방적인 홍보조정에 순응하여 독재권력에 협조해 온 그러한 양면성도 없지 않아 있읍니다.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판단은 아까 참고인 이동욱씨의 말씀과 같이 일단 역사에 맡겨봅시다.
그러나 80년 신군부 세력의 등장기에 언론인 강제해직사태는 군부나 정부의 강압적인 해직요구가 있어도 증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언론인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닌 증인들이 최종 해직조치를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그 책임에 대해 면탈할 길이 없다고 본위원은 생각합니다. 증인들께서는 부정했지마는 보안사의 요구보다 더 많은 기자를 해직시켰다는데 대해서 많은 국민들은 일단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부 군부세력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장악하는 것이 언론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불법적 행위를 미화시켜 선전 홍보하기 위해 언론기관을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 국민은 많은 의혹이 있읍니다.
언론의 최대 아킬레스건, 즉 언론의 최대약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지금까지 5공에서 저질러졌던 불행한 사태는 불가피한 타율적이라고 증인들은 말씀을 했읍니다.
권력이 어떤 식으로 언론을 강제하는지 여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방우영 증인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참다운 언론은 언론이 재정적으로 독립할 때 비로소 언론이 자유가 이루어 진다고 보고 있읍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많은 비난도 받고 또 많은 질책도 받고 있읍니다.
뉴욕 타임즈는 1년에 6,800만불의 흑자를 냈고 워싱턴 타임즈는 3,000만불의 흑자를 내고 LA타임즈는 2,000만불의 흑자를 내고 있읍니다.
저희 언론이 거듭 태어나서 언론의 정도를 걸을 수 있도록 위원들께서 오늘 이 시간부터 키원 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읍니다.
백남치 위원
알겠읍니다.
같이 공동 노력을 해야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자유언론을 주장했던 여러 과거와 현재의 언론인들과 같이 정신적인 면도 중요한 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점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독재권력을 가지면은 무조건 언론을 함부로 할 수 있는지 제가 의심이 갈 때가 많습니다.
공권력에 항거하기 위해 노력한 유별난 흔적이 없이 너무 쉽게 독재권력에 동조함으로써 용기없는 것으로 국민에게 비춰지고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이에 대한 장강재 증인의 소견을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마는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언론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지마는 뼈아픈 자성을 하고 있읍니다.
백남치 위원
좋습니다.
국민은 언론을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읍니다. 언론은 항상 정의롭고 정론을 쓰고 있다고 국민은 믿고 있고 믿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언론이 5공기간에 절대권력에 순치되어 소수군부권력에 이 나라를 넘겨주는 데 크든 작든 일조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국민에게 모든 언론은 사과해야 된다고 본위원은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 이종기 증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종기 전 중앙일보 사장
저희가 과거와 지금과를 비교해 볼 때 과거의 모든 잘못된 일을 반성을 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아까 어떤 위원님께서도 사설로서 낼 수 없느냐 하는 그런 말씀도 계셨읍니다마는 사설 한 장으로서 이것이 끝날 일이 아니고 한 마디의 말보다는 모든 지면을 통해서 실제로 어떻게 우리가 과거를 반성하고 해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을 국민이 보고 있을 것입니다.
백남치 위원
기대하겠읍니다.
그러면 결론을 맺겠읍니다. 국민들은 답답할 때 시원한 말을 약해질 때 힘있는 말을 탄압받을 때 저항의 소리를 타락한 정권에게는 정의의 철퇴를 신문에서 찾으려 노력하고 기다리다 기다리다 드디어는 지쳐서 포기함과 동시에 열화와 같은 민주화의 운동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에는 오늘과 같이 역사상 유례없이 대언론사의 사장들이 국민 앞에 공동으로 진실을 밝힘으로써 사과하고 속죄할 장을 만들어 주기에 이르렀읍니다.
여기서 국민은 다시 한번 증인 여러분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어 봅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희생을 당했고 핍박을 받아 왔읍니까?
정치군인들과 일부 추종자들로 인하여 얼룩진 5공의 언론사야말로 새로운 민주시대 새로운 국민시대를 열어 가려는 현시점에서 우리나라 4대 일간신문의 사장인 증인 여러분께서는 살을 깎는 아픔으로 그동안 지은 과오를 속죄해야 된다고 본위원은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언론의 자유란 결코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목적이며 우리의 정신적인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5공기간 동안의 반민주적 반민주적 권력자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정권안보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언론의 자유란 외국의 어떤 신문의 표제와 같이 인쇄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문에 게재한다 라는 그러한 말과 같이 자연스러운 상태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결코 어떤 의도인 제한과 통제 이러한 것이 불순한 목적과 연계될 때 독재의 독버섯은 또 다시 자라게 될 것이며 5공과 같이 정신적 파산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경고하면서 본위원의 남은 평생을 통해 아니 영원히 두 번 다시는 이렇게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정말로 절망적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지면서 본위원의 의견을 마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수고하셨읍니다.
다음은 손주항 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좀 간단하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손주항 위원
시간 얼마나 주시렵니까?
위원장 정대철
간단하게 해 주십시오.
손주항 위원
알았읍니다. 평민당 손주항 위원입니다.
이 나라 언론을 지켜오시고 또 운영하는 데 수고하시는 우리 증인들을 앞에 놓고 드리고 싶고 묻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또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워낙 제약을 받기 때문에 두가지것만 묻고자 합니다.
맨 먼저 한국일보 장강재 증인께서 말씀드리겠읍니다.
조금 전에 증인께서는 한국일보사가 80년대에 해직자 중에 지금 약 12명의 복직을 추진하고 있는데 11명은 되고 1명이 지금 절차중이라고 이렇게 말씀했읍니다.
그 한 명이 본위원이 조사한 바로는 노형기씨라고 귀사에 70년도에 입사한 25기 공채기자인 것이 사실입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맞습니다.
손주항 위원
노형기씨 한 분이 지금 아직 그렇게 안되고 있는 모양인데 시간으로 보아서 어제입니다마는 어제 10시 20분에 제가 우리 비서를 통해서 노형기씨하고 직접 통화를 했읍니다. 그랬더니 이것은 시간이 없으니까 거두절미하고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더군다나 오늘 의제가 언론인해직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에 노형기씨는 원대북귀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읍니다. 또 절실하게 바라고 있읍니다. 이 분이 물론 어렵게 여러가지 고난을 겪어왔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인께서는 노형기씨의 주장이 설사 좀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노형기씨를 과감하게 한국일보에 도로 복직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줄 용의가 있읍니까?
장강재 전 한국일보 사장
복직은 결정이 되어 있는데 실무적으로 저희가 해직기자의 의사를 최대로 수용하면서 회사내의 인사절치상 그런 아주 실무적인 문제입니다.
손위원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노기자를 저한테 보내 주십시오.
손주항 위원
해직공무원도 정부에서 지금 50% 보상을 해준다고 하는데 그런 차원에서 대 한국일보에 지금 노기자의 그러한 어려운 것을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여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언론에 당부드리고 싶은 얘기를 많은 우리 동료 선배위원들이 말씀을 했읍니다마는 제가 첨가해서 또 한번 저도 강력히 주장할 얘기가 있읍니다.
사실은 시간이 좀 있으면 한국일보 지금 증인으로 나와 계시는 장증인께 한국경제의 통폐합 당시의 얘기를 듣고 싶어 했읍니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이증인께 TBC의 그 슬펐던 얘기를 듣고 싶었읍니다. 그리고 역시 동아일보의 김증인께 DBS의 그때 사정을 듣고 싶어 했읍니다. 그러나 시간이 워낙 쫓기고 있기 때문에 제가 마지막으로 제가 보는 지금 언론이 새로 태어나야한다고 하는 얘기를 우리 동료 선배위원들이 많이 하고 있읍니다. 본위원도 똑같은 얘기를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강력히 그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떻게 되었건 새로운 차원에서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고 화학적인 변화차원에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소리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매도하기보다도 언론을 소종하게 알고 언론이 참 자랑스럽게 꽃이 피고 새로운 장이 열리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역사는 언론을 보고 있읍니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언론을 지금 보고 있읍니다. 그리고 각자 회사내에 움직이고 있는 양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 소장 기자분들이 언론을 지금 경영관리하고 있는 사주들을 보고 있읍니다. 나는 그러한 세월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오늘 밤늦게 나와 낮아 계시는 증인 여러분께 이 말씀을 간곡히 전달하면서 제 신문을 마치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그러면 마지막으로 조세형위원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좀 해 주십시오.
조세형 위원
밤이 너무 늦었읍니다.
사실 저는 4대 신문의 최고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증인들께서 오늘 이렇게 증인석에 나와야 했다는 사실 그 사실 자체가 굉장히 유감스럽습니다.
여러 증인들은 오늘 사실은 어떻게 보면 신문사나 방송을 빼앗긴 그런 피해자의 입장도 있읍니다. 또 그동안 언론인강제해직 등등 이런 책임있는 유책자의 입장도 또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 문공위원회의 마지막 날이 되겠읍니다마는 이 청문회의 큰 목적은 5공화국 전두환전권이 무리하게 권력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언론에 대해서 특히 세 가지의 방법 즉 하나는 언론통폐합 하나는 강제퇴직 또 하나는 언론통제 이런 여러가지 방법을 썼는데 거기에 대해서 과거 여러 해 동안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문의 최고책임자였던 여러분들이 과연 어떤 입장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을 규명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정치적인 역사적인 불행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겠다 하는 것을 자성적이고 반성적인 입장에서 규명하는 데 그 의미와 목적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선 피해자로서 DBS 동아방송을 빼앗긴 동아일보의 김상만회장 또 TBC를 빼앗긴 중앙일보 동양방송측의 이종기회장 또 서울경제를 빼앗긴 한국일측의 장강재회장 이렇게 여러 증인들에게 그 경위를 묻고 싶습니다마는 그것은 대강 국민들이 유추해서 알고 있읍니다.
그래서 그것은 생략을 하겠읍니다.
지금 순서가 다 지나가고 거의 마지막이 된 것 같은데 국민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기는 것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지난번 이철 위원이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윤곽이 드러난 것입니다마는 당국에서 명단을 신문사에 준 것은 강제해직에서 298명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직된 것은 933명입니다.
그러면 635명은 누가 보탰느냐 하는 것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커다란 의문점의 하나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까 여러 위원님들의 질문과정에서 문공부를 통해서 모안사를 통해서 1차 2차 3차 이렇게 어지럽게 강요를 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그것이 누적이 되어가지고 실제 강제해직당한 기자와 비슷한 수효의 그런 명단이 내려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능히 생각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지금 저희가 국회측 측 청문회를 주관해서 하고 있는 우리 국회의원들 측으로는 여기에 대한 명단을 당국에 제출해 달라 해도 자료를 주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솔직히 말씀드려서 여기에 나와 계시는 증인들이 스스로 그것을 밝혀주지 않으면 당분간은 알길이 없읍니다.
그런데 아까 네 분 증인들께서 아주 분명하게 더 보탠 인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렇게 전부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일단은 공식적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이렇게 치부가 되겠읍니다마는 이 문제는 아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국민들이 여러 네 증인의 그런 명백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그래도 역시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계속해서 갖게 되리라 이렇게 보여집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물증 증거가 나온다면 더이상 말할 것이 없고 그렇지 않다면 이와 같은 오해를 풀기 위해서도 여러 증인들께서 직접 가지고 있는 그 수단 신문을 통해서 이 문제를 계속해서 파헤쳐 가지고 스스로 이 문제를 파헤쳐서 그래서 누구의 책임이 되었건 아직 완전하게 씻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 의혹을 최대한으로 청소하는 데 노력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또 이와 같이 얹혀서 해직을 한 기자가 있다 없다 문제를 떠나서 사실은 그 동안 수백명의 기자가 강제해직을 당했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런 대신문들이 그와 같은 군사독재권력 앞에 그렇게 쉽게 제대로 저항한번 못하고 제대로 소리한번 못내고 이렇게 국복을 해서 전달된 명단대로 그 자기들이 아끼던 그런 기자를 해직을 시켰다 하는 그 사실에 대해서 이 사람은 괴장히 실망을 하고 또 참 유감스럽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실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것이 없이 여기에는 60년 70년된 전통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고 또 해방 후에 나왔읍니다마는 그야말로 빛나게 그동안 전통을 쌓았던 그런 신문들 4대신문입니다.
동아일보같은 데는 멀리 뭐 수십년전가지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80년 당시만해도 국보위설치에 축하사실을 쓰라는 것을 거절을 하고 광주의거가 났을 때
수일간씩 사설을 게재 않는 것으로서 용감하게 저항을 하고 또 조선일보는 근자에 아주 단단한 결심을 가지고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그런 용감한 과감한 사설을 게재를 하고 있고 또 중앙일보는 이와같은 모든 진상을 용감하게 공개하는 데 앞장을 서고 있고 또 한국일보는 그동안 언론통제의 규제의 진상에 대해서 어느 신문보다도 더 앞장서서 공개를 함으로써 이와 같은 모든 문제에 대해서 아주 역사적인 조명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퍽 이것을 자랑스럽고 또 다행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여기서 여러 증인들께서 과거의 그런 오욕된 기록들을 반성을 한다 자성을 한다 이제는 새 출발을 해야겠다 그런데 그것은 말로만 가지고 되지는 않고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여러가지의 행동적인 실증적인 것이 있어야겠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동안 강제해직되었던 사람들을 원상회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여러 증인들 스스로 말하는 불명예를 씻는 가장 실증적인 그런 길이다 사실 희생되었던 강제해직 당했던 기자들은 한때 구속도 당하고 그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읍니다. 그중에는 부인을 무참하게 희생을 당해가지고 그런 엄청난 가족적인 희생을 당한 그건 기자도 있읍니다.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비통한 그런 생활에 빠진 사람들도 있읍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오늘날 이 시점에 와서는 결단코 죄인도 아니고 불명예스러운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때 희생당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다 나느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점에서 그 사람들의 원상회복을 이 자리에서 여러 증인들께서 다짐해 주실 것을 내가 감히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원상회복이라고 그래도 여러가지 상대성이 있는 것 같습닏. 형식적으로 복귀를 하라 이렇게 통지를 했는데 안 온다 이런 경우도 있고 조건이 맞지 않아서 안 오는 경우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는 모양인데 예를 들면 아까 김상만증인께서도 말씀을 하셨지만 당시 동아일보 논설주간으로 있었던 박권상씨의 경우 같은 그런 경우에는 복직을 하라 했는데 정년도 되고 자유기고나 하겠다 그렇게 설명을 하셨읍니다마는 제가 듣기로는 그런 게 아니고 복직을 하라고 했는데 동아일보측에서 희생자의 전원을 복직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선별적으로 복직을 하라고 한 것같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최고위자이고 제일 어른인 박권상씨로서 어떻게 이렇게 선별적으로 회사에 돌아오라는 것을 다른 부하들은 아직도 회사에 못돌아가고 있는데 나만 어떻게 돌아 가겠느냐 부를려면 다같이 전원을 불러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런 입장에서 아직 복직을 않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듣고 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같이 박권상씨 경우뿐만 아니라 각사에 대해서 상당히 상대적인 그런 복직의 문제가 있는 것같습니다.
현실은 복직이지만 내용면에서도 조건면에 있어서도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여러 증인들께 오늘 요청이라고 그럴까 부탁이라고 그럴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동안 80년도 그리고 그 이후에 강제 해직됐던 사람들에 대해서 첫째는 희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원을 복직해주기를 바란다 둘째는 차등없이 복직해주기를 바란다 과거에 무슨 편집국 기자하던 사람을 사무국 직원으로 복직을 해라 이것은 사실 말이 그렇지 그것은 복직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또 그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공백이 있었던 이 사람들 그동안 엄청난 희생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만큼 아까 손주항위원께서도 공무원조차도 이제 정부가 절반 정도의 보상을 한다 이렇게 나오고 있는데 신문자측에서도 정당한 보상 그동안의 손해보상이라고 그럴까 이런 것을 해 주는 것이 좋겠다 이 세가지 이 세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상당히 여러 증인들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실증적인 그런 새로운 축발이 다짐이 되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조금 이상스럽게 생각되는 형식일지 모르겠읍니다마는 그런 점에서 우선 동아일보의 김상만회장께 어떠시냐하는 것을 우선 묻고 싶습니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75년 관계를 구체적으로 한번 말씀드리겠읍니다.
조세형 위원
죄송합니다.
제 말씀드리는 것은요 80년도 강제해직…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80년의 것을 종합해서 말씀드리겠읍니다.
공보부에서 제1차로 80년 8월 9일에 온 것이 33명입니다. 보안사 2차 통지에서 80년 12월 31일에 3명이 왔읍니다. 그리고 3차로 보안사에서 한 명이 왔는데 이것은 81년 1월 30일입니다. 합해서 37명입니다.
그래서 동아일보사는 제일 먼저 84년에 열 명을 복직시켰고 87년 3명을 복직시켰고 88년에 6명을 복직시켰읍니다.
그래서 19명이 복직되었읍니다.
조세형 위원
예. 대강 알겠읍니다.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그러고 미복직자는 13명입니다.
그러고 복직을 거부하는 이가 5명입니다.
그래서 미복직자는 합해서 18명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읍니다마는 80년 8월에 그 당시에 보안사에서 퇴직시키라고 한 사원들을 우리 마음대로 하지를 못하고 퇴직시킨 데 대해서는 대단히 마음 아프게 생각을 하고 있읍니다.
조세형 위원
예. 알겠읍니다. 제가요 지금 대단히 중요한 저 나름대로는 마무리를 할까 이렇게 하고 싶어 하고 있는데 제가 배당받은 시간이 굉장히 모자라고 또 위원장이 저렇게 시간을 재촉하기 위해서 자꾸 일어섰다 앉았다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꼭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김상만 증인께 아까 말씀드린 요지 물론 저도 알고 있읍니다.
미복직자중에는 정부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도 있고 타신문사에 들어간 사람도 있고 그것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미복직자가 있다는 것도 제가 알고 있읍니다. 조건이 안 맞아서…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비록 김상만 증인께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나와 계시는 모든 증인께 부탁드리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당한 보상을 주면서 복직을 시켜주십사 그것이 여러 증인들께서 거듭해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출발에 부합되는 실증적인 하나의 실적으로써 남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뜻에서 물어본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김상만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
알겠읍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먼저 복직시킨 분들이 84년에 10명이라고 말씀드렸읍니다. 그런데 이미 4년이 지났어요. 84년과 지금 88년이니까…
84년에 들어온 복직사원들은 당시에 그냥 그대로 있던 사원들보다는 대우가 조금 차이가 있읍니다.
그러나 대우는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어떤 론설위원은 상무가 되었읍니다.
그리고 어떤 사원은 평사원이었는데 지금 어느 중요한 부의 부장이 되었읍니다.
조세형 위원
예. 알겠읍니다. 제가요 지금 중요한 것을 말씀을 네 증인께 전부 여쭙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간에 쫓겨가지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고 마지막 순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중요한 문제를 김상만 증인의 긴 설명을 듣다가 그것을 못물어보면 곤란할 것 같아서 그러면 제가 딴 증인께서 그것을 물어보겠읍니다.
방우영 증인께서는 어떠십니까?
방우영 전 조선일보 사장
위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알겠읍니다.
위원장 정대철
조위원!
이병용 위원
위원장! 청문호에서 이 자리에서 그 증인들한테 어떻게 보상한다는 것을 말을 듣는다는 것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직위의 계승이라든가 이것은 거기에서 고려해야할 사항 아닙니까? 그것을 빡빡 이 자리에서 답변하라고 하는 것은 듣는 분들도…
위원장 정대철
이렇게 하십시다.
조세형 위원에게 그렇게 노력하시겠읍니까 묻고 예 그러고 하고 끝내십시다. 제가 대신해서 묻겠읍니다. 조위원께서 15분이상 쓰셔서 너무 많이 지난 것 같습니다.
조세형 위원
내가 3분만 묻겠읍니다. 양해해 주세요. 제가 이것을 여러 증인에게 드리는 것은 누구누구 구체적인 인원을 구제하고 싶다든가 그런게 아니라 그것이 원칙의 문제이고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야 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겠읍니다.
75년 사태에 대해서도 사실 제가 말씀을 디리고 또 부탁도 드리고 싶습니다마는 워낙 동료위원들께서… 사실 또 제가 시간을 많이 쓴 것이 사실입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우리 신문들이 지금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 증인들께서 말씀하시는 것 듣고 여러가지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참 뜻밖이고 굉장히 거기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아무쪼록 우리 신문들이 1,000도가 넘는 그런 용광로와 같은 그런 열기로 저는 쇳물을 다 부어서 버려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열도로 새로운 쇠를 달구어내가지고 완전한 국민에 보답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또 부탁을 드리면서 이 사람의 신문을 마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위원장 정대철
마지막으로 또 손주환 위원이 간단하게 하신다고 그러니까 손주환 위원 간단하게 신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손주환 위원
밤이 깊었기 때문에 딱 한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읍니다.
민정당의 손주환 위원입니다. 한국일보의 장강재 증인께서 문공장관으로부터 160건에 이르는 소위 보도지침을 위반했다면서 위협을 받았다는 것은 본위원이 이원홍 증인의 신문을 통해서 확인한 바가 있읍니다. 이러한 사실을 5공화국 시절에 우리 언론이 제도적인 제약과 권위주의정권의 힘 앞에서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였는가를 객관적으로 입증시킨 사례라고 이렇게 본위원은 생각합니다.
비단 한국일보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인들이 이와같은 노력을 한결같이 기울였다 이렇게 본위원은 생각을 합니다.
지금 참고인석에 계시는 이동욱 참고인에게 한가지 묻겠읍니다.
제5공화국의 언론은 제도권 언론으로 유압적통치기능의 일부였다고 우리 언론을 한 마디로 매도하는 극단적인 견해가 있읍니다.
이러한 견해는 마치 일제하에 우리 언론인들이 모두 식민지 통치에 부역을 하고 반민적주의적인 행위를 했다는 주장과 비견할 수가 있읍니다.
이 일제하의 언론이 우리 민족에게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중심역할을 했음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읍니다.
참고인께서 5공화국의 언론을 억압적인 통치 기능의 일부였다고 생각을 하시는지 간단하게 소견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읍니다.
이동욱 전 동아일보 발행인
그렇게 생각합니다.
위원장 정대철
이제 더이상 신문하실 위원 안계시지요?
그러면 이것으로 김상만 방우영 이종기 장강재… 조용하십시오. 좀 조용하세요. 아직 끝나지 않았읍니다. 방청인들도 끝까지 다 앉아 계십시오.
증인들도 위원님들도 다 앉아 계십시오.
4인의 증인에 대한 신문을 마치겠읍니다. 모두 조금만 한 2ㆍ3분만 남아 계십시오. 또 2차 안건이 있어서 2ㆍ3분이면 됩니다. 증인들께서도 오랫동안 수고 많으셨읍니다마는 같이 끝나고 나가실 수 있도록 3분만 좀 좌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위원장 인사말은 여러 위원님들의 좋은 뜻으로 대신합니다. 밤늦도록 내일의 자유언론을 위해서 힘써 주신 문교공보위원회 위원님들 또 증인 여러분 그리고 국회관계자 여러분과 청문회 기간동안 격려와 질타를 아껴주지 않으신 국민여러분에게 당 문공위원회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것으로써 언론강압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마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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